(1) 윤관의 여진 정벌과 귀족 사회의 동요
윤관의 9성
숙종 때 만주 하얼삔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을 손에 넣었다. 이어서 그들은 다시 함흥 부근까지 손을 뻗쳐, 고려에 복속하였던 여진족을 아우르고, 정주에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 기병인 여진족의 군대를 보병만으로는 방어하기 곤란하였으므로, 숙종은 신기군이란 기병 부대를 조직하고 승병의 항마군, 보병의 신보군을 편성하여 여진 정벌을 계획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예종 때, 윤관이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토벌하여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 함주를 중심으로 9성을 쌓았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이 계속 침입하였으므로 9성을 수비하기가 곤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9성의 환부를 애원해 왔고, 또 서북에는 거란의 세력이 있었으므로, 동북의 여진족 토벌에만 전 국력을 경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9성을 쌓은 지 1년 만에 이를 여진족에게 내주고 말았다.
금의 압력과 북진 정책의 좌절
부족을 통일한 여진족은 그 뒤, 예종 때 요의 군대를 격파하고 독립하여,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이 때, 송은 여진족을 끌어넣어 요에 잃은 땅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고려는 그 때까지 안정되었던 국제 관계의 변동을 염려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송은 마침내 금과 연맹하여 요를 멸하였으나, 대신 금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금은 요를 멸한 뒤에,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해 왔다. 원래 고구려 시대부터 우리 나라의 문화를 보급받아 성장해 온 여진족인 금에게 우리가 사대의 예를 취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이나 김부식 등의 문신들은 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이와 타협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북진 정책은 사실상 좌절되었고, 귀족 사회 안의 내분만 격화되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족벌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구성된 귀족 사회에서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족벌들이 자연히 세력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된 이래 80년간이나 정권을 잡았다.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의 딸은 예종의 왕비가 되어 인종을 낳았는데, 예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왕실 외척인 이자겸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였다.
이에, 김부식 일파는 군신의 구별을 엄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견제하였고, 한편 인종도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안 이자겸은, 척준경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궁궐을 불사르고 인종을 독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벌어지자, 왕은 척준경을 달래어 이자겸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척준경도 정지상 등에게 몰려 내쫓겼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고 인심이 불안해지자, 개경은 지덕이 쇠하여 서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 때, 정지상, 묘청 등은 서경 천도를 계획하였으나, 김부식 등은 이에 반대하였다. 한편, 외교 문제에 있어서도 여론이 금에 대한 사대를 불쾌히 여기던 때라, 묘청 등은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김부식 등은 금과 충돌하는 것은 송에 이용당하는 위험한 일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이 계속되어 서경 천도가 불가능하게 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1년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김부식의 토벌로 평정되었다.
묘청의 난은 귀족 사회 안의 족벌과 지역의 대립, 풍수설에 결부된 전통 사상과 보수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금의 압력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원인이 얽혀 일어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