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립 운동의 방향과 3⋅1 운동
독립 운동의 방향
근대화에 뒤진 우리 민족은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둔 민족 의식은 기어이 항일 독립할 것을 기약하고 있었다. 1907년을 전후해서 애국 계몽 운동으로 불리는 민족 운동은 의병의 항전과 더불어 항일 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안창호, 이동녕, 이동휘, 박은식, 신채호, 이승훈, 양기탁 등 수백 명의 민족 운동자들로 이루어진 신민회의 활동이었다. 이들은 비밀 결사를 통하여 민족주의 교육의 실시, 국민의 근대적 자주 의식의 고취, 민족 산업의 육성, 민족 문화의 계발 등 활발한 민족 운동에 앞장 섰다. 또한, 신민회는 국내에서 정치 활동이 불가능함을 예상하고 국외의 독립 운동 기지 설정에도 앞장 섰다. 독립 운동 기지란, 서북 간도와 연해주에 한민족의 집단적 거주 지역을 만들어 항일 독립 운동의 거점을 이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을 모아 근대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시키고, 해외에 있는 한민족을 조직화, 무장화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 운동 기지로 유명한 것은 이시영, 이상룡 등이 설치한 서간도 삼원보(三源堡)와, 이상설, 이승희 등이 밀산부(密山府)에 자리잡은 한흥동(韓興洞)으로서, 이 기지를 중심으로 하여 민족주의 교육 기관과 독립군의 간부 양성 기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세워짐으로써 독립군의 무장 항쟁의 터전이 닦여 갔다.
한편, 중국 상하이와 톈진 또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 같은 곳에 민족 운동자들이 망명하여, 그 곳의 한교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각기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국내 민족 운동자들은 헌병 경찰 통치하에도 불구하고 독립 의군부, 광복회, 국권 회복단, 국민회 등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각지의 사립 학교와 천도교, 크리스트 교의 종교 조직망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 그리고 종교인들은 민족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3⋅1 운동
민족 운동이 국내외에 걸친 거족적 운동으로 성숙되어 가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포함한 14개조의 평화안이 제시되어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때, 국외에서 활약하던 민족 운동자들은 파리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인의 독립 결의를 알리고 국제적인 도움을 얻으려 하였는데, 상하이의 신한 청년단이 김규식 등을 파리에 보내어 독립을 호소한 것은 이 활동의 한 성과였다.
한편, 국내의 민족 운동자들도 이와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면서 거족적인 운동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최팔룡 등 일본 유학생들 600여 명은 토오쿄오에 모여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 정부와 정계에 통고하였다(1919. 2. 8.).
이보다 앞서, 국내의 민족 운동자들도 세계 정세의 변화를 살피면서 구체적인 운동을 계획 중이었으므로, 일본 유학생들의 거사에 자극을 받아 시위일을 고종의 인산일로 결정하고 거족적인 운동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손병희, 한용운, 이승훈 등 33인이 민족 대표의 이름으로 조선 독립 선언서를 선포함으로써 3⋅1 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이 때, 파고다 공원에서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서울 시내의 각급 학교 학생과 일반 시민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평양, 의주, 원산 등 지방 도시에서도 감행되었다. 이리하여,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는 시위는 전국 방방곡곡에 파급되었다. 이 거족적 운동에 직접 참가한 인원 수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 확인한 것만도 200만에 달하였고, 시위 횟수도 1500여 회나 되었다.
일본은 그들의 헌병 경찰은 물론, 육⋅해군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인가와 학교에 방화하는 등 평화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 때, 일본 관헌에 의하여 피살된 이는 근 7천여 명, 부상자는 1만 5천여 명, 투옥된 이는 5만여 명에 이르렀고, 불탄 가옥과 학교, 예배당 등도 750동이 넘었다.
결국, 한민족은 이와 같은 3⋅1 운동으로 민족사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민족의 단결을 굳혔고,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성스럽게 천명하였다. 이로써, 민족의 끝없는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하였고, 일제에 동조하는 열강들로 하여금 한국인의 독립 문제를 바로 깨닫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1) 또한, 그 후 한국의 민족 독립 운동을 국내외의 거족 항쟁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줄기찬 것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끝내는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기약할 수 있었고, 민족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일치 단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기반을 튼튼히 마련할 수 있었다.
1) | 3⋅1 운동은 국외에까지 영향을 끼쳐, 중국의 5⋅4 운동이나 인도의 사티야그라하 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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