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고대 사회의 발전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5) 신라 말기의 사회 변동

중앙 귀족의 왕위 쟁탈전

무열왕의 직계 자손들의 전제 왕권은 혜공왕 때에 와서 방계 귀족의 반란으로 몰락하였다. 이와 함께, 선덕왕 때부터는 내물왕계의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격화되어, 155년간에 20여 명의 왕이 교체되었으며, 웅천주 도독 김헌창의 반란과 같은 지방 반란이 그 뒤에도 잇달아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해안 지방에 해적들이 자주 나타나, 우리 해안과 일본 해안을 습격하여 그 곳 주민들을 잡아다 당에 노예로 파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신라인으로서 당에 머물러 있던 장보고가 이러한 것을 보고 귀국하여,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해적들을 소탕하였으며, 나아가서 남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당,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그 뒤, 장보고는 중앙 귀족의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신무왕을 도와 즉위시킨 일까지 있었으나, 암살당하고 말았다.

장보고 이후에도 강주, 금성, 송악 등지에서는 국가의 감독을 받지 않으며 당이나 일본과 무역하는 해상 세력들이 성장하였다. 내륙 지방의 호족 세력들도 사병을 거느리고 농장을 소유하면서 점차 그 세력을 키워 중앙 귀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신라 말기의 사회 동요

진성 여왕 이후에 와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각처에서 해상 세력이 등장하고, 지방 호족 세력이 독립하여 중앙의 지배력이 못 미치게 되었으며,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가 되거나 반란을 일으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교 사원은 귀족들의 재산 도피 장소가 되었다. 당시 신라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는 최치원 등 지식인들의 건의가 있었으나, 이들은 탄압당하거나 배척당하였다.

이러한 때에 중앙 진골 귀족들은 아직도 골품 제도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의 불교나 화랑도에서 항상 강조되어 오던 국가 정신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독점 세력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수취가 국가 경제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항 운동이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졌다.

선종 9산의 등장

선종은 통일 전후에 전래되었으나, 교종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신라 말기에는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교종의 기성 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개인적인 정신 세계를 찾는 경향이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중앙 귀족들이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있을 무렵, 지방에서는 호족 세력들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선종의 각 파들은 이러한 지방의 호족 세력과 관계를 가지고 각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선종 9산이라는 여러 종파를 이루었다.

신라의 5교 9산   

원래 선종은 중국에서 새로운 문화 운동의 하나로 성립된 종파였던 까닭으로, 이 선종은 신라인으로 하여금 그만큼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많은 도당(渡唐) 유학생들의 반신라적 움직임과 결부되어 고려 왕조 개창에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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