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Ⅱ. 중세 사회의 발전2. 귀족 사회의 발전과 변동

(1) 고려 전기의 사회

사회 신분 제도

고려 시대에 와서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친족 공동체들은, 다시 몇 개의 대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대가족장의 권위를 인정하여 조세, 공납, 요역의 의무를 가족 단위로 지움으로써 사회의 운영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사회는 평민에서 상류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가족 단위로 편제되었다.

지방 호족들이 특별한 공이 있든지,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집권 체제 안의 고관이 되면, 중앙 귀족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리고, 중앙 귀족들은 서로 혼인 관계로 연결되어 커다란 족벌 세력을 이루었는데, 고려의 정치는 이 족벌 세력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대표적인 큰 족벌로서는 경원 이씨, 경주 김씨, 해주 최씨 등을 들 수 있다.

후삼국 시대에는 신라의 골품 제도가 붕괴되고 지방에서 호족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통일된 신분 체제가 성립되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의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가 성립되면서부터 사회 신분이 명백해져, 그에 따른 사회 생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고려 사회는 상류의 왕족과 귀족, 중류의 하급 관리와 중앙의 군인, 하류의 평민, 그리고 최하층의 천민과 노비 등 네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왕족과 문무 양반의 신분을 가진 중앙 귀족 등의 상류층은 전시과의 토지를 받고, 공신전과 공음전 등을 따로 받아 대토지를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 참여하여 출세의 길을 독점하였다.

중류는 궁중의 잡일을 보는 남반 관리나 기술관을 비롯한 하급 관리와 중앙의 군인들로서, 지배층의 말단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류인 평민 계급은 농민,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생산을 담당하고 조세, 공납, 요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천민 계층은 부곡, 향, 소 등의 주민과 진척, 화척, 재인 및 공사 노비 등이었다. 가장 천대를 받던 노비는 상속되고 매매되었으며,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은 자동적으로 노비가 되었다.

노비에는 전쟁 노비나 형벌 노비도 있었으나, 기근과 질병이 발생하든지, 귀족들의 고리대업에 희생되어 생활이 어려워진 평민이 귀족이나 지방 부호의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 시설과 법속

농업을 주요한 경제 기반으로 하는 고려로서는 농민의 몰락은 곧 국가 경제의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국가적으로 농업을 장려하였다. 성종 때에는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과 상평창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밖에도,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가 있었고, 서울에는 동대비원과 서대비원을 두어 빈민 환자에게 약과 의복을 주었다.

한편, 고려 사회는 대가족 제도를 운영하는 관습법을 중심으로 다스려졌다. 지방관은 중요한 사건만 서울의 상부 기관에 올려 보내고, 대개는 스스로 처결하였다.

고려의 중앙 집권 체제는 이러한 지방의 자치 질서를 인정하면서 그 기반 위에 성립된 정치 제도였다. 그리하여, 고려에는 당률을 모방한 71조의 법률과, 이를 보충하는 보조 법률이 있었으나,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대개 전통적인 관습법을 따랐다.

한편, 형벌에는 태, 장, 도(징역), 유(귀양), 사(사형)의 5종이 있었다. 특히, 국가에 대한 반역죄, 불효의 죄 등은 중죄로 다스려 무거운 형벌을 가함으로써 대가족 중심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간에서 장례나 제례, 또는 복을 기원하는 의식 등은 대개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의 전통적인 의식과 도교 신앙의 풍속을 따르고 있었다. 연등회와 같은 불교 행사나, 토착 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팔관회 같은 행사는 국가의 제전으로 중시되었다. 특히, 팔관회 때에는 왕이 몸소 식장에 나와 신하들과 더불어 음악과 연극을 보고 즐겼다.

이 밖에, 정월 초하루, 삼짇날, 단오, 유두, 추석 등의 명절이 있었는데, 삼한 시대 이래의 명절인 단오 때에는 격구, 그네, 씨름 등을 즐겼다.

보의 발달과 화폐의 주조

곡식이나 포(베)를 꾸어 주는 고리대업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 와서 귀족, 사원, 지방 호족 등에 의해 한층 더 성행하였다. 농민들은 양식이 떨어지면 고리대의 곡식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고리대와 세금 때문에 농민 생활은 자립이 대단히 어려웠다.

한편, 고리대업이 성행함에 따라 보(寶)가 성행하였다. 보는 기금을 만들어 그 이식으로 사업 경비를 충당하는 일종의 재단이었는데, 학교 재단인 학보, 불경 간행을 위한 경보, 빈민 구제를 위한 제위보, 팔관회의 경비를 염출하기 위한 팔관보 등이 있었다.

고려 사회는 자급 자족하는 농업을 경제의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상업이나 공업은 크게 발달할 수 없었다. 상업은 넓은 장소에 모여서 물물 교역을 하는 정도였으며, 교역을 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은 역시 곡물과 베였고, 쇄은이라 하여 은을 무게로 달아 사용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성종 때에는 건원중보라고 하는 철전을 주조하였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 뒤, 숙종 때에는 은 1근으로 활구라고 하는 은병을 만들어 화폐로 사용하게 하고, 또 동국통보 등 동전도 주조하였으나, 그 유통 범위는 대체로 귀족을 중심으로 한 상류 사회에 한정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고려 시대의 화폐   

해외 무역의 발달

문화가 발달하면서 고려와 송 사이에 무역이 성하였다. 송에서 비단, 약재, 서적 등을 수입하고, 금, 은, 나전 칠기, 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당시 요는 은을 가지고 와서 식량, 문방구 및 구리, 철 등으로 바꾸어 갔고, 여진족은 은이나 모피, 말 등을 가지고 와서 철제 농기구와 식량 등을 사 갔다.

일본과도 무역을 하였으나, 송이나 요에 비하면 그리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도 송을 거쳐서 고려에 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수은, 향료, 산호 등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들이 고려에 왕래함에 따라 고려(Corea)라는 이름이 서방 세계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활발한 외국과의 무역 활동은 고려의 사회,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해외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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