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부여는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494).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따로이 행정 구획인 사출도(四出道)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왕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법으로는 4조목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하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고조선의 8조의 법과 같은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농경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보는 점복을 하기도 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남하한 주몽에 의하여 건국되었다(B.C.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서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로서, 토지가 척박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모자랐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변의 국내성(통구)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또 동쪽으로는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고구려 역시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대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독립된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에 의해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데릴사위의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 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부여와 같은 점복의 풍습이 있었다.
옥저와 동예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방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인하여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통합된 더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옥저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소금, 어물 등 해산물을 공납으로 바쳐야 하였다. 옥저인은 고구려인과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으며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의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고 삼베도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산천을 중시하여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삼한(한)
한강 이남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辰)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B.C.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은 대전,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 큰 것은 만여 호, 작은 것은 수천 호로 총 10여만 호였다.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는데, 큰 것은 4천~5천 호, 작은 것은 6백~7백 호로 모두 4만~5만 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영도 세력이 되었다1). 삼한의 지배자 중 세력이 큰 것은 신지, 견지 등으로 불렸고, 작은 것은 부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원시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민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초가 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 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연일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농경을 위한 저수지가 많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은 삼한 시대 이래의 저수지들이다.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일본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문화의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와,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커지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 성립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1) |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과 직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부로 옮겨 예산, 익산 지역을 거쳐 나주 부근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근초고왕이 마한을 병합하는 4세기 후반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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