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중세 사회의 발전1. 중세 사회로의 전환

(2) 한국의 중세 사회

지방 세력의 대두

신라는 9세기 말에 이르러 사회적 모순이 크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신라 사회를 이끌어 왔던 골품 제도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진골 세력이 분열되어 왕위 쟁탈전을 벌임으로써 중앙 정부의 권위는 실추되고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하여 갔다.

이러한 속에서 정치는 부패하고, 지배 계급은 불법적으로 농토를 늘려가는 한편, 농민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고, 그 중에는 농토마저 빼앗기고 유랑하는 무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패하고 무능한 신라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 호족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새로이 등장한 호족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하나는 토착적인 지방 세력이 성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진골과 6두품 귀족들이 호족화한 것이었다.

이들 지방 세력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하여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 점차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성주(城主) 또는 장군(將軍)이라 칭하면서 사병을 보유하고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이들 호족에 의해 점차 해체되어 갔고, 중세 사회로의 진입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호족의 성터(광주 무진)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와 두각을 나타낸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견훤은 본래 상주의 농민 출신으로 신라 서남 지역 방위군의 장군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자신이 거느린 군대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900). 후백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였다.

한편,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는 처음에는 양길의 부장이 되었다가 강릉을 점령한 후, 서쪽으로 진출하여 강원도, 경기도 일대를 차지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서쪽의 황해도 지역까지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나라를 세워 후고구려라 하고 송악에 도읍하였다(901).

그 후 궁예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조령을 넘어 상주 일대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여 후백제보다 먼저 신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궁예는 또 죽령 이남의 영주 일대를 차지하여 옛 신라 땅의 절반 이상을 후고구려 영토로 편입시켰다.

궁예는 영토가 확장되고 국가 기반이 확충되자,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마진으로 고친 후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먼저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사회 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한 세력은 신라 6두품 계열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신라 사회가 지녔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궁예는 9관등제의 실시와 함께 새로운 왕조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광평성을 국정의 최고 기구로 하는 중앙 관제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태봉으로 고친 뒤에는 반신라 정책을 강화하며, 통일 전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렇듯 후백제와 태봉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신라는 그 영토가 날로 줄어들어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고려의 건국

후삼국의 분열은 신라 사회의 모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후삼국의 분열을 수습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한 지도자가 왕건이었다.

왕건은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예성강 유역의 해상 세력과 힘을 합하여 그 일대에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그 후 궁예 세력에 귀부하여 궁예의 부하가 된 뒤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다. 특히, 수군을 이끌고 나주 지방을 점령하고 후백제를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시중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왕건은 호족적 기반을 갖춘데다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궁예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기반이 미약한데다가 견훤과 마찬가지로 고대적 전제 군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며 지나친 불교 행사를 벌임으로써 불교계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는 등 실정을 거듭하여 마침내 신하들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자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도읍을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옮겼다. 이후 국가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호족 세력들을 회유, 포섭하여 통일 역량을 키워 나갔다.

민족의 재통일

태조는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해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는 한편,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여 갔다. 또, 태조는 태봉의 외교 정책을 바꾸어 신라에 대하여 화친 정책을 썼다. 이와 함께 지방 호족들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회유하였으므로, 다수의 지방 세력이 고려 편으로 들어왔다.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였을 때에도 태조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후백제군과 싸웠다. 고려와 후백제는 팔공산, 문경, 풍기, 안동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군사력이 강하여 고려군이 수세에 몰렸으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고려는 통일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또, 후백제 내부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정세가 고려측에 유리하게 되었다. 즉,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사랑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큰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폐위한 다음 금산사에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고려에 항복해 오자, 태조는 후백제 정벌군을 일으켰다. 고려군이 경북 선산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936).

이에 앞서 신라는 나날이 국토가 줄어들고 국력이 약화되어 국가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경순왕은 신하들과 협의한 끝에 고려에 항복하였다(935).

한편,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 통합의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 주었다. 당시 고려에 온 발해 유민 가운데에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 상류층 지식 계급이 상당수 있었는데, 왕건은 이들을 적재 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고려의 통일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새로운 중세 사회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선, 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호족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를 개혁하는 데 앞장 서서, 골품제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분 체제를 만들어 갔다.

또, 유교 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가 마련되었다. 6두품 계열의 유학자들과 지방에서 성장한 호족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골품제의 조직 원리와는 다른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정립시켰다. 이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고, 특히 농민의 조세 부담을 가볍게 하는 등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정치⋅사회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한편, 통치 체제의 강화를 위하여 교육과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 문화의 폭과 질이 크게 높아진 중세 문화를 성립시켰다. 즉, 고려의 문화는 통일 신라의 혈족적 관념과 종교의 제약에서 벗어남으로써 문화의 폭이 한결 넓어졌다. 그리고 유교 사상이 발달하고 불교의 선종과 교종이 융합되어 문화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송, 원, 서역 문화와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독특한 개성을 가진 문화를 창조하였다. 또, 지방 세력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지방 문화도 발달하고 문화의 내용도 보다 다양해졌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민족 의식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고려인들은 고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어 낸 역사적 경험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하여 강렬한 민족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거란, 몽고 등의 북방 민족에 대항하여 끈질긴 항쟁을 펴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훈요 10조(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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