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민족의 독립 운동3. 독립 운동의 전개

(3) 학생 항일 운동

6⋅10 만세 운동

192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대립 속에서, 독립 운동은 그 진로 모색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때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1926).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은 3⋅1 운동에서 이미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 다시금 전개한 독립 운동이었다. 이 사건의 밑바탕에는 일제의 수탈 정책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었다.

6⋅10 만세 운동은 전문 학교와 고등 보통 학교의 학생, 그리고 사회주의계에 의해 각각 추진되었다. 순종의 인산 당일, 일제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행사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은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침으로써 대규모의 군중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6월 10일 당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각급 학교에 연쇄 반응을 일으켜 확대되어 갔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6⋅10 만세 운동 때의 격문

광주 학생 항일 운동

3⋅1 운동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각종 민족 운동과 국내외의 항일 투쟁은 청년 학생들에게 민족 자주 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스스로가 민족 독립 투쟁의 중요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였다.

6⋅10 만세 운동 직후부터 경향 각지의 각급 학교에는 크고 작은 항일 결사가 조직되어 식민지 교육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 등의 방법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더욱이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조직된 신간회의 활동은 국민들의 자각을 높여 주었다.

동맹 휴학 건수
연도 건수
1920 20
1922 52
1926 55
1927 72
1928 83
1929 78
1930 107
1931 102

이와 같은 여건하에서 광주에서 일본 남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한⋅일 학생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들만 검거, 탄압하자, 광주의 모든 학교 학생들이 궐기하였고(1929), 이에 일반 국민들도 가세함으로써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학생, 대중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를 확립하라”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의 격문

학생들의 항일 투쟁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194개의 각급 학교 학생 54,000여 명이 참가함으로써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만주에까지 확산되어 이 지역의 민족 학교 학생들도 참가하였고, 일본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도 궐기하였다.

이처럼, 3⋅1 운동 이후에도 민족의 독립 항쟁은 6⋅10 만세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계승되었고, 특히 학생들이 독립 투쟁의 주역이 되어 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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