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5. 근⋅현대의 정치[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개항과 개화 정책

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서 조선 정부는 미국과 조약(1882)을 맺은 뒤,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과 청,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신식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구식 군인, 하층민 등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1882). 이에,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서울에 들어온 청의 군대는 일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잡아갔다.

강화도 조약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이고, 병자 수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조선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을 규정한 통상 장정을 맺었다.

최혜국(最惠國) 대우

통상, 항해 조약 등에서 한 나라가 가장 유리한 대우를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것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운동
강화도 조약을 맺기 위해 회담하는 조선과 일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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