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5. 근⋅현대의 정치[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926).

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권을 빼앗긴 후에 애국 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대한 독립군김좌진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옮겨 갔으나,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이봉창윤봉길이었다.

한편, 1937년에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조선 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읽기자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1941. 12.)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 영, 미, 소, 캐나다,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인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하에 조성된 창춘 및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 처칠 선언의 각 조를 견결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신간회 강령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간도 참변(1920)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개소를 불태운 사건

3부의 활동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재만 동포의 자치 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자체의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주요 의거(義擧) 활동

- 강우규:사이토 총독에 폭탄 투척(1919)
- 김익상: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1921)
- 김상옥: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1923)
- 나석주: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 투척(1926)
- 이봉창:도쿄에서 일본 국왕에 폭탄 투척(1932)
- 윤봉길: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 전승 축하식에서 폭탄 투척(1932)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기념탑(광주 북구)
무장 독립군의 대일 항전(1920~1930년대)
북로 군정서군의 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 사진
한국 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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