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민족 국가의 발전

(1) 신라의 통일과 발해의 건국

신라의 통일과 그 의의

신라가 당의 힘을 빌린 것은 민족을 통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일시적 방편에 불과했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당은 물러가지 않고, 도리어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나아가 신라까지도 속국화하려는 기색이 보이매, 신라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꾀하고, 또한 처음에 의도한 바 민족 통일이라는 대사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꼈다. 과연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의 유민들과 협력하여, 수 십 차에 걸친 당나라 군사와의 충돌 끝에 문무왕 16년 경(서기 676년) 반도 안의 당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대동강 및 원산 이남의 땅을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통일이라는 온 겨레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흩어져 살던 우리 민족은 비로소 한 땅 위에서 한 나라로 뭉치어 살게 되었으니, 이 때부터 우리 나라는 단일 민족 국가로서의 씩씩한 역사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발해의 흥망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남부의 영토와 백성들은 신라에 합쳐져버렸으나, 북쪽 지방은 신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간 이를 통합할 만한 중심 세력이 없어서 흩어져 살던 차, 고구려의 옛 장군인 대조영(大祚榮)이 일어나 전부터 고구려에 붙어 살던 이 지방의 말갈족을 주로 하고, 여기에 고구려 유민을 합하여 나라를 세우니(서기 699년), 이것이 진국(震國)이며, 후의 발해(渤海)이다.

발해는 2대 무왕(武王), 3대 문왕(文王) 등 훌륭한 왕이 계속되어, 10대 선왕(宣王) 시에는 그 세력이 북은 흑룡강, 동은 동해, 서는 요하에 이르렀으며, 남은 신라와 접하여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갖추게 되었다.

발해의 지도   

또한 발해는 당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과 교역하여, 문화, 경제에 있어서 볼 만한 것이 있었으니, 당나라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성국(盛國)이라 일컬었다. 발해의 서울이었던 상경(上京)의 옛 터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보면, 그 문화의 찬란함과 서울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선왕 이후 발해의 힘은 나날이 기울어져서, 14대 애왕(哀王)에 이르러 결국, 동몽고 지방에서 일어난 걸안(契丹)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발해의 정치는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행하여졌으므로, 이 나라는 고구려의 재흥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이 문화와 습관이 다른 말갈족이었기 때문에, 남쪽에 있었던 신라와는 동일 민족이라는 관념이 없었던 모양으로, 이 두 나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우리 민족의 후계자는 신라만인 느낌을 주었다.

〈알아두기〉

안동도호부. 대조영. 해동성국. 오경(五京). 진국.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