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민족 국가의 발전

(2) 통일 신라의 융성

새로운 제도의 마련

반도 안의 당 세력을 몰아내고자 신라는 당과 충돌하여, 두 나라 사이는 한 때 좋지 못하였으나, 그의 목적을 달성한 신라는 다시 당에 대하여 겸손한 태도로 대하였으므로,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고 당(唐)의 발달한 문화와 제도는 직접 신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여 대동강과 원산을 이은 선까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 넓은 지방에 새로운 행정 구역(行政區域)을 만들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때부터 다음 신문왕(神文王) 대에 걸쳐, 중국식으로 전국을 9주로 나누며, 나라 여러 곳에 5경을 두었고, 이 지방 이름도 본시는 우리 나라 말로 되어 있던 것을, 경덕왕 때에 이르러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었다.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서울도 마땅히 동남 구석인 경주에서 중앙으로 옮겨야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주에 자리잡고 있었던 귀족들의 반대로 인하여 그대로 머무르게 되어, 중앙 귀족들의 횡포와 지방 정치의 혼란을 가져오게 한 것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신라는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우선 국가 경제에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토지에 대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으니, 즉 성덕왕은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본받아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나누어 주었다(서기 722년). 이 새로운 제도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어, 그들의 살림살이를 편하게 하는 한 편, 국가의 수입을 늘였다. 그러나 귀족 계급은 사전(賜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더우기 자기의 강대한 세력으로 약한 백성의 정전을 빼앗으니, 이 좋은 제도도 다시 흩어지게 되었다.

산업과 도시의 발달

통일 후의 신라는 땅이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가며, 또 오랜 평화가 계속되었으므로 모든 산업이 다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의 중요한 산업은 여전히 농업으로서, 국가는 이의 장려에 힘을 썼다.

한 편 귀족들의 생활이 사치하여지면서, 당과의 무역이 발달하고 명주, 비단, 고운 모시, 금, 은의 세공품, 도기, 칠기 등의 수공업이 자못 발달하게 되었다.

신라 시대의 장신구의 보기   

이와 같이 생산물이 늘어감에 따라 상업이 번성하여, 도시는 발달되고, 해외 무역도 활발하게 되었다. 서울 경주는 상업 도시로 번영하여, 통일 전에는 동시(東市)만 있었던 것이, 통일 후에는 다시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열리게 되고, 그 전성시대에는 55동(洞), 18만 호(戶)나 되었다 한다. 서울 안에는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개와집이었으며, 노래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 넘쳤다 하니, 얼마나 그들이 넉넉한 살림살이를 하였나 짐작할 수 있다.

국내의 상업뿐 아니라, 당과의 교역도 자못 활발하였다. 신라와 당과의 교통은 백제 및 고구려와 다툴 때부터 빈번하였으나, 통일 후에는 더욱 잦게 되어서, 신라는 조공(朝貢)이라는 형식으로 공무역(公貿易)을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私貿易)도 매우 활발하였다. 신라에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금, 은의 세공품, 각종의 비단, 저포와 인삼 등이었고, 당에서의 수입품으로서는, 여러 종류의 직물(織物), 의복, 서적 등으로서, 사치 생활에 젖은 신라 귀족들은 당나라의 진귀한 물건을 사들이기에 바빴다.

신라의 해상 발전

당과의 무역이 활발하여 신라 상인으로서 해상으로 진출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또한 당의 문화를 배우러 가는 신라의 유학생 및 유학승의 왕래가 잦아서, 당나라 해안 지방에는 여러 곳에 신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또한 신라인의 절이 많았다 하니, 신라의 해외 진출이 얼마나 활발하였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신라의 세력이 약하여지자 황해 위에는 이러한 선박을 노리는 당의 해적이 출몰하여, 신라의 해상 활동은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이 해적들을 소탕하고, 신라의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하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가 곧 장보고(張保皐)이다. 장보고는 일찍부터 당에 건너가 무명(武名)을 떨친 군인으로서, 당의 해적에 의하여 신라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의분(義憤)을 느끼어, 신라에 귀국 후 흥덕왕께 건의하여, 군사 1만 명과 다수의 배를 가지고,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베풀었다. 이리하여 그는 황해 위의 해적을 없애버리고, 그 위에 많은 선박으로 당 및 일본과 교역을 활발히 하여, 신라로 하여금 해상왕국(海上王國)을 이루게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장보고가 왕위 다툼에 관계하여 암살당하니, 청해진도 황폐하여, 신라의 해상 발전도 쇠퇴하여졌다.

〈알아두기〉

구주 오소경제도. 정전(丁田). 청해진. 신라방. 장보고. 신라의 상공업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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