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활짝 핀 신라의 문화
학문의 발달
반도를 통일하고, 긴 태평 세월이 계속된 신라는 온갖 힘을 내치(內治)에 기울여 산업을 발달시키는 한 편, 융성한 성당(盛唐)의 문물을 받아들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게 하였다. 그 당시 당은 가장 문운(文運)이 트인 시대였으며, 그 위에 신라와 당과의 왕래가 매우 빈번하여, 신라 유학생과 유학승 및 상인들에 의한 당문화의 받아들임이 매우 활발하였으므로, 신라의 문화는 볼만한 것이 많았다.
유학과 한문학(漢文學)이 귀족들 사이에 성행하게 되니, 신문왕 때에는 처음으로 국학(國學)을 세워서 유교경전(儒敎經典)을 가르치게 하고,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과거(科擧)의 제도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학문이 자못 발달하고, 많은 학자가 나왔는데, 그 중 유명한 이는 강수(强首), 설총(薛聰), 김대문(金大問), 최치원(崔致遠) 등이다. 강수는 당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外交文書)를 잘 만든 문장가이며, 설총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로서 이두(吏讀)를 만든 사람이다. 김대문은 화랑세기(花郞世紀) 등의 많은 책을 썼으며,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이름난 학자로서 그가 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우리 나라에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랜 책이다.
이러한 한문학은 주로 귀족들 사이에 넓혀졌으나, 이 때 새로이 국문학인 향가(鄕歌)가 유행하여, 일반 평민들에게 보급되었다. 원효대사, 월명사(月明師), 충담사(忠談師) 등은 유명한 향가의 작가이며, 대구화상(大矩和尙)은 역대의 향가를 모아 삼대목(三代目)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산학(算學), 천문(天文), 의학(醫學), 병학(兵學) 등도 발달하여 볼 만한 것이 있었다.
불교와 예술
불교를 믿어야 나라가 흥한다는 사상에 의하여, 신라는 많은 절과 탑을 세웠으니, 경주를 중심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 불국사(佛國寺) 등 큰 절이 즐비하였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또한 죽은 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교가 번성하였으며, 따라서 유명한 중도 많이 나왔다. 원효, 의상(義湘) 등은 당시의 고승(高僧)이며, 교통이 불편한 그 때에 수륙 몇 만리를 가깝다 하고 멀리 인디아에 유학한 중도 여럿이 있는데, 그 중 혜초(慧超)는 본국까지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이란 여행기를 남기어 유명하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현재 경주 근처에 남아 있는 예술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불교 예술의 찬란한 발달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경덕왕 때 김대성(金大城)이 이룩한 불국사와 석굴암(石窟庵)은 가장 대표적인 당시의 예술품으로, 그 구상(構想)의 뛰어남과 표현 솜씨의 정교함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 외에 봉덕사(奉德寺)의 종과 법주사(法住寺)의 석등(石燈) 등은 가치 있는 유물로서, 신라 불교 예술의 일면을 엿보게 하고 있다.
신라의 서화(書畵)에 있어서는 김생(金生)의 글씨가 유명하였고, 또한 김충의(金忠義)의 그림이 뛰어난 바 있었다.
〈알아두기〉
이두. 혜초. 의상. 불국사. 김생. 강수, 최치원. 원효대사. 삼대목. 김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