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일 신라와 발해

1. 통일 신라의 발전

〔학습 개요〕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려는 당의 야심을 분쇄하고, 거족적으로 뭉쳐 당 세력을 물리쳐 삼국을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하나의 정부 아래에서 정치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단일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집결시키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포섭하였으며, 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행정 제도와 군사 제도를 개편하였다. 특히, 중앙 관청을 집사성, 병부, 위화부, 사정부 등 10여 개로 늘려 정사를 분담시켰고, 지방에는 9주 5소경을 두었다.

신라는 안으로 이처럼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한편, 당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문물과 수공업을 발달시키면서 찬란한 민족 문화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학습 문제

1.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2. 신라의 삼국 통일 전과 후의 정치 제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3. 신라는 민족 국가의 발전을 위해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어떻게 포섭하였을까?

4. 신라인의 해상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은 신라에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통일의 의의

삼국 중에서 가장 발전이 늦었던 신라는, 6세기 중엽 이후 안으로 국력을 기르면서 밖으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펴,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넘어뜨리고, 끝내는 당군을 축출하여 통일을 이룩하였다.

대왕암   
문무왕의 해중 능이다. 왜구를 막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바다에 장사지냈다. 경북 월성군 앞바다 소재.

신라의 삼국 통일은 우리 역사상 큰 의의를 가진다. 통일 전까지 정치, 사회, 문화를 달리했던 우리 민족은 삼국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할 수 있었고, 특히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포용함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영토는 비록 만주까지 못 미쳤으나, 강대국인 당의 세력을 몰아 내고 민족의 독립을 지켰다는 점에서 큰 뜻이 있다.

집사성과 9주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새로 아우르게 된 국민들을 잘 다스리기 위하여 정치 제도 등을 개편하였다. 이러한 개편은 태종 무열왕을 거쳐 신문왕 때에 이르러 거의 완성되었다.

통일 신라는 먼저 왕권을 강화했다. 상대등의 세력은 약화되고, 국왕의 직속 기관으로 집사성의 장관인 시중이 국무 총리격이 되어 모든 행정을 주관했다. 그 밖에 병부, 위화부, 사정부 등이 행정을 맡아 보았다.

지방은 신문왕 때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에는 도독을 두었다. 주 아래에는 군과 현이 있었으며, 특수 부락으로 향, 소, 부곡이 있었다. 농민은 실제로 촌주가 다스렸다. 그리고, 5소경을 두어 지방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았다.

통일 신라의 행정 구역   

또, 지방의 호족을 인질로 삼아 교대로 서울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상수리 제도라 하는데, 이것은 후일 고려의 기인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통일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군사 조직을 강화하였다. 중앙군으로서 수도 주위에 9서당을 두고, 지방에는 각 주에 하나씩 정을 두었는데, 지역이 넓은 한산주에는 2정을 두어 모두 10정이 되었다.

경제 생활

삼국의 통일로 영토가 넓어지고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게 되었다.

통일 후, 신라는 귀족과 공신에게는 식읍 또는 녹읍을 주었고, 백성에게는 정전을 주어 생활을 안정시켰다. 또, 각종 산업이 발달하여 생산이 늘어 갔다. 양잠, 목축 등이 성하였고, 금은 세공품, 견직물, 마직물, 나전 칠기, 도기 등의 수공업이 발달했다. 촌락에서는 가축 및 뽕나무, 잣나무 등을 길렀다.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서울인 금성은 한때 17만여 호나 되는 큰 도시를 이루었다. 금성에는 통일 전부터 있었던 동시와 함께 서시와 남시의 큰 시장이 설치되어, 상업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안압지   
통일 신라 시대 왕궁의 정원으로, 인공 호수이며, 축대가 견고하다. 최근에 복원되었다. 경북 경주 소재.

해상 무역

8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와 당의 관계는 다시 가까와져서 신라에서 많은 유학생, 유학승을 파견하는 등 국제적인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였다. 또, 일본과의 교류도 점차 늘어 갔다.

신라의 당, 일본과의 무역은 처음에는 국가 간에 행해진 공무역이 성하였는데, 점차 민간 무역도 늘어갔다. 모시, 삼, 금은 세공품 등을 당에 수출하였고, 당으로부터는 비단, 책, 관복,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무역로는 전라 남도 영암, 경기도 남양만에서 중국의 쟝쑤 성, 산뚱 반도 방면으로 가는 바닷길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과는 남해안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왕래하였다.

통일 신라의 해상 무역로   

당시 신라인의 당나라 무역은 대단히 성하여, 쟝쑤 성과 산뚱 반도에 신라방이라는 신라인의 마을이 생기고, 신라소라는 감독 기관이 있었으며, 또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있었다.

학습 정리

1. 신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국력을 축적하고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고,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 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였다.

2. 통일 이후,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통합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주력하였다.

3. 통일 신라는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에 나서서 당과 일본의 중간 무역으로 이익을 취하였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당에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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