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쌀과 일본 자본주의
1876년(고종 13) 개항과 동시에 조선의 쌀은 일본 자본주의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0년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서 면 공업(綿工業)이 발달하면서 조선 쌀은 대부분 오사카 지역 노동자가 소비하는 상품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진행된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 협상에서 조선 정부는 쌀의 무역을 금지하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조선시대 동래 왜관(東萊倭館)에서 이루어졌던 쌀의 공무역을 공식적인 통상 품목으로 확인받으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248)
쌀은 주식으로 조선 내에서 수요량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 공급되는 상품이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 이래 시장의 상품화가 가장 많이 되고 있던 상황으로 볼 때 쌀은 이미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소비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쌀의 수출이 본격화될 경우 서울을 비롯한 도시 쌀값의 등귀(騰貴)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통상 조 약 체결에서 쌀의 유출을 최대한 방지하고자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자연재해 등으로 곡물이 부족해질 경우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위해 미곡을 항구 간 수출입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고, 두 나라의 조약 조문에 명기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자국의 조문에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이라는 글자를 삭제함으로써 사실상 쌀의 통상을 허용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 두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항의하였지만, 조선의 조약 조문에 명기된 것을 기준으로 할 경우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249)
조일 통상 장정 제6칙의 조문 “조선국 항구 거류 일본인은 양미와 잡곡을 수출입할 수 있다.”의 취지와 내용은 미곡의 교역 금지를 전제로 하여 다만 인도적인 견지에서 곡물 부족 시에 개항장 거주 일본인의 식량 사정을 고려하여 미곡의 수출입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250) 여기서 말하는 수출입이란 단지 항구 간의 반출을 의미하는 것일 뿐 교역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곡의 교역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하였다.
미곡 교역 불허를 둘러싼 조선 정부와 일본 정부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 은 채 1876년 흉년으로 조선에서 곡물이 부족해지자 일본의 쌀이 일시적으로 유입되었다. 흉년이라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지만,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곡물 교역의 기점이 되었다.
이미 개항된 부산을 통해 삼남(三南) 지역의 쌀이 수출되는 동안 1880년(고종 17) 원산, 1883년 인천이 개항되었다. 또한 1876년(고종 13) 조일 통상 장정에서 합의된 무관세 무역이 진행되면서 쌀을 비롯한 콩 등의 곡물이 일본으로 다량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1877년 부산항에서 약 5,600석, 2만 2000여 원에 달하였던 미곡 수출액은 1881년 4만 4000석, 38만여 원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미곡 수출이 일시적으로 크게 감소하였지만, 그 후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251)
이처럼 개항 초기 조선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된 이유는 당시 일본의 수출입 무역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1890년 오사카에 면 공업 지역이 조성되기 이전 일본은 아직 산업 자본이 발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국의 자본 축적을 위해 조선에서 값싼 쌀을 수입하는 대신 일본 쌀을 고가로 수출하는 이중 교역을 하고 있었다.
일본 쌀은 런던 미곡 시장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 그리고 호주 시장에 수출되었고, 그로 인해 부족한 일본 국내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값싼 조선 쌀과 난징(南京) 쌀 등 동남아시아의 쌀을 수입하였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런던 곡물 시장에 쌀을 수출한 것은 조선 쌀이 일본으로 대량 유입되었던 1878년부터였다. 일본은 1878년에 2만 7000여 톤, 1882년에는 3만 3000여 톤을 수출하였다. 런던으로 건너간 일본 쌀은 영국에서 소비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런던 곡물 시장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공급되었다.252)
조선 쌀의 유입과 일본 쌀의 유럽 수출이라는 일본의 미곡 수출입 구조는 1890년 이전 일본 자본 축적의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었다. 일본 지주에게는 유럽 시장의 높은 쌀값으로 인해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1890년 이후 조선의 총수출액에서 쌀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57%로 급증하였다. 이후 쌀 수출액은 흉년과 청일 전쟁 시기에 감소하였지만, 전반적으로 금 수출액을 제외한 상품 총 수출액의 50%에 달하는 높은 비중을 점하고 있었다. 여기에 콩의 수출액까지 합한다면 상품 총수출액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80%에 달하였다.253)
이처럼 급격하게 일본으로 쌀의 유출이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오사카 지역의 면 공업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1890년 오사카 지역에 대규모 면 공업 지대를 조성하기로 결정한 일본은 원료인 면화를 미국에서, 면방적 및 방직 기계를 영국에서 수입하였다. 은을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일본이 금을 무역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미국·영국에서 원료와 기계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무역 결제 수단의 안정성이 절실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금과 은의 시세 차이가 크게 벌어졌기 때문에 일본의 외환 시장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에 일본은 금 본위제(金本位制)로의 이행을 결정하여 산업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도모하였고, 오사카 지역 면 공업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자본의 발달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비롯해서 동아시아 면제품 소비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영국산과 인도산이었다. 특히 인도산 면제품은 영국산보다 품질이 낮은 대신 가격이 쌌기 때문에 중국 소비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았다. 반면, 일본은 영국산 기계와 미국산 면화를 수입하여 면제품을 생산하였기 때문에 중국 시장에서 인도산 면제품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제품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인도의 면 공장 노동자는 한 달에 7엔을, 일본의 면 공장 노동자는 한 달에 4엔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일본 면 공장 노동자의 저임금은 일본 면제품의 가격 경쟁력의 원천이었다.254)
값싼 조선의 쌀은 저임금 시장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고, 오사카 지역에 대량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900년 오사카 지역 면 공장 노동자의 임금은 인도의 면 공장 노동자 임금의 절반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조선 쌀의 유입으로 가능한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수출 쌀의 가격 은 오사카와 고베(神戶) 지역 쌀값과 연동하면서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255)
248) | 김경태,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4, 66∼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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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 『고종실록』 권13, 고종 13년 7월 6일(갑자). |
250) | 하원호, 『한국 근대 경제사 연구』, 신서원, 1997, 23쪽 표 2. DB주석) 한국문화사 책자에 '조일통상장정'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이며 '조일무역규칙'이 맞다. |
251) | 김윤희, 『대한제국기 서울 지역 금융 시장의 변동과 상업 발전』,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118쪽. |
252) | 하원호, 앞의 책, 217∼253쪽. |
253) | 『일성록(日省錄)』 고종 12년 9월 23일 ; 고종 15년 6월 26일, 7월 19일 ; 고종 20년 3월 5일, 10월 24일. |
254) | 인천부청(仁川府廳) 편, 『인천부사(仁川府史)』, 인천부(仁川府), 1933, 1029쪽. |
255) | 일본 외무성 통상국, 『통상휘찬(通商彙纂)』 제168호, 진남포 32년 무역 연보(鎭南浦32年貿易年報)(1900), 여강출판사, 19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