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귀향형과 충상호형의 행형체계
고려의 행형체계는 당률체계의 5형인 태·장·도·유·사가 기본이었고, 그 중에서도 유배형 중심의 자유형이 가장 중요한 행형체계였다. 유배형만 하더라도 유 2천리∼3천리 형은 중국에 비해 훨씬 좁은 국토를 가진 고려에서는 규정대로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설정되었음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러한 경향은 관인의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행형체계에 있어서도 같은 맥락에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의 관인과 고려의 관인과는 그 존재 양상과 권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국가와 관인과의 관계, 국왕과 관인과의 관계가 각각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당률에서 관인에 대한 행형체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官當收贖法의 내용이 고려에 그대로 수용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死刑과 加役流 등 일부 유형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실형에 처하지 않는 당률의 법의가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고려 실정에 맞춘 형벌체계가 바로 歸鄕刑과 充常戶刑이라 할 수 있다.410)
형벌적 기능과 고려율의 운용에 있어서 귀향형과 충상호형이 갖는 행형체계는 어떠하였는가. 다음의 사료는 유배형과 그 실상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① 官吏가 監臨하면서 관물을 훔친 자(監臨自盜)와 감림하면서 재물을 받고 법을 어긴 자(受財枉法者)는 職田을 회수한 다음 귀향시킨다(≪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② 僧人이 寺院의 미곡을 훔친 자는 귀향시켜 常戶에 충당한다(위와 같음).
③ 官物을 무역한 자는 귀향형을 제외하고는 법에 따라 科罪한다(위와 같음).
④ 鎭人으로 귀향죄를 범한 자는 그대로 本處에 머무르게 하고 만약에 田丁을 받은 자는 그 田을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준다. 流罪를 범한 자가 東界의 鎭人이면 北界에 移配하고, 북계의 鎭人이면 동계로 이배하되, 남계로 이배하지 못하게 하였다(이와 같음).
⑤ (현종 7년 5월) 刑部에서 奏하기를 ‘관리가 감림하면서 관물을 훔친 자는 贓物의 多少를 헤아리지 않고 모두 除名하여 本貫으로 유배하소서’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위와 같음).
위의 사료는 귀향형의 대상과 수형자의 복역장소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 귀향형의 대상이 되는 부류는 관리·승려·진인411) 등이다. 이들은 전시과체제 내에서 功蔭田·科田·閑人田·軍人田 등을 지급받는 계층으로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한 白丁보다는 한 단계 높은 계층이다.412)
둘째, 수형자의 귀향장소에 관한 문제이다. 위의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귀 향죄를 범했을 경우 현거주지에 상관없이 획일적으로 귀향형을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①·②·⑤ 의 귀향지가 본관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④ 의 경우 진인이 귀향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현재의 거주지가 곧 귀양처가 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 귀향죄를 범한 관리나 승려의 현거주지가 본관지일 때는 그 본관지가 바로 귀향지가 된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리의 경우 직전의 회수·제명 등 기존의 특권이 박탈되며, 승려의 경우는 환속됨과 아울러 해당지역에 편호되고 있음이 확인된다(②).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귀향형의 본질적인 행형내용은 거주지의 강제이동이라기 보다는 직전의 몰수·제명 등 수형자의 기존의 특권이 박탈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귀향형에 처해지는 죄목, 즉 귀향형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문제이 다. ① 에서 보듯이 관리의 監臨自盜罪(횡령죄)와 收財枉法罪(수뢰죄)가, 그리 고 ② 의 승려의 절도죄가 귀향형에 처해지는 구체적인 죄목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공사노비를 유인하여 도망시키거나 타인에게 방매한 자는 초범일지라도 귀향형에 처해졌다.413) 따라서 귀향형의 대상은 관리의 횡령죄와 수뢰죄, 승려의 절도죄, 불법인신매매죄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귀향형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귀향형의 성격에 대하여 正刑을 면 제하는 대신 과하는 윤형, 즉 환형으로 보기도 하지만,414) 윤형에는 환형뿐만 아니라 부가형도 있다. 따라서 귀향형이나 환형, 또는 부가형이냐에 따라 행 형체계에 있어서 귀향형의 위치는 크게 달라진다.
앞의 사료 ① 의「감림자도」·「수재왕법」은 당률에서는 이미 제명에 처하는 죄였다. 원래 제명 그 자체가 부가형이지만, 귀향형은 제명에 부수되는 형벌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⑤ 는 관인을 제명하여 서인신분으로 떨어뜨리는 경우에는 본관으로 유배되었다는 것인데, 관인을 대상으로 하는 귀향형이 부가형이라 할 때, ②에서의 승려의 귀향형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승려 특유의 형벌로 서 환속을 생각할 수 있다. 승려가 사원의 미곡을 절취한 경우에는 환속되는 것만이 아니고 본관에 유배되는 부가형이 과해졌던 것이다.
臨津縣人 裵行이 왕명을 위조하여 趙京 등 7인에게 관직을 주었다. 법으로는 마땅히 絞刑에 처할 것이나 마침 사면이 내린 때이므로 귀향형에 처하였다(≪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즉위년 9월 정유).
위의 사료에서 배행의 행위는 법대로 하면 교형에 해방되지만 마침 사면을 받아서 귀향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행은 주형은 사면되고 부가형인 귀향형만 적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주형이 사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귀향형으로 처벌한 것은 귀향형이 제명이나 면관처럼 본형이 아니고 징계처분적 성격을 갖는 부가형적 처벌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료를 분석해 볼 때 귀향형의 주된 행형내용이 부가형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量移的 성격도 갖고 있다. 그리고 양이에 대한 사료도 자주 보이는데415)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二罪(斬刑과 絞刑)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되, 참형·교형에 해당하는 자는 섬으로 유배보내고, 전에 섬으로 유배된 자는 육지로 내보내고, 이미 육지에 나와 있는 자는 귀향형에 처한다. 그리고 귀향형에 처해져 있는 자는 上京하게 하고, 이미 상경해 있는 자는 朝會에 참가하게 하며, 이미 조회에 참가하고 있는 자는 다시 등용하였다(≪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3년 10월 갑신).
일반적으로 量移의 대상자는「流配者」·「配流者」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귀향형에 처해진 자도 섬에 유배된 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배자·배유자로 일괄되어 있다. 유배자의 양이는 配島 → 出陸 → 歸鄕 → 上京이라는 순서로 행해지고 있다.
다섯째, 앞의 사료 ④에 의하면 귀향죄와 유죄는 구별되고 있으며, 거기에 대응하는 형벌내용을 보면 귀향형보다는 유형이 더 중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귀향죄를 범한 자에게는 本處에 유배시키고 田丁을 몰수하여 타인에게 주는 것으로 그치지만, 유죄를 범한 자는 동계와 북계사이에 상호 유배시키고 있다. 이미 鎭人이라는 신분이 담당하고 있는 군사적 기능을 박탈시키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라 생각된다.
또 초범·재범의 단계와 남녀를 구별하여 가중처벌하는 행형체계를 볼 수 있는데,416) 이로써 依律斷之 → 歸鄕 → 充常戶刑 순으로 형이 가중되는 일련의 행형체계가 운영되고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해명해야 할 부분은「의율단지」의「율」이라 할 것이다. 이 용례는 ③ 에서 貿易官物者에게 과해지는「依律科罪」의 경우도 같은 성격이라 이해된다. ③ 에서는 귀향형을 면제하고「의율과죄」하는 과형과 무역관 물죄보다 죄상이 무거운 ① 의 관리의 횡령죄와 수뢰죄는 도형과 장형을 물론하고 직전을 회수한 다음 귀향시킨다는 행형체계를 분석해 볼 때,「의율단지」또는「의율과죄」에서의「율」이란 도형이라 생각된다.
결국 귀향형의 형벌적 성격은 도형보다는 무겁고 유형보다는 가벼운 것으로 판단되지만, 당률을 모델로 하는 유형과는 전혀 다른 행형체계임이 주목된다. 만약에 귀향형이 유형의 한 단계에 속하는 것이라면 재범단계에는 유 2천 리·3천 리 또는 配島·配遠惡地 등으로 가중 처벌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행형체계는 귀향형 → 충상호형으로 처벌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벌체계야말로 당률 또는 송률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려의 독자적인 행형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끝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은 귀향형과 충상호형과의 관계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사료가 있다.
① 制하기를 ‘여러 관인으로 귀향형에 처해진 자를 常戶에 충당하는 것과 위협하여 죽게 한 자를 絞刑으로써 논하는 것은 義에 어긋나는 일이니 모두 면제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恤刑 문종 20년 7월).
② 紹하기를 … ‘그 僧徒가 奸을 범하고 영구히 鄕戶에 충당(永充鄕戶)되어 사면을 거쳐서도 풀려나지 않음은 가혹한 법이라 할 것이니 마땅히 有司로 하여금 검찰하여 모두 軍役에 충당시키라’고 하였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恤刑 예종 원년 7월).
③ 왕이 敎書를 내리기를 … ‘전에 유배에 처해진 자 중 반역·불충불효·살인강도·미리 계획하여 고의로 겁탈하여 죽인 자(謀故劫殺)·鈒面充常戶者 외 그 나머지 입도자들은 육지로 내보내어 고향에 와 있게 하고, 고향에 있던 자는 왕에게 참알하는 것을 허용하며, 참알하는 것을 허용받은 자는 서용하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다(≪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24년 정월 무신).
① 은 귀향된 관인을 충상호형에 처하는 것은 위협하여 죽게 한 자417)를 교형으로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사료에서 주목되는 것은 귀향형보다 한 단계 중형에 해당하는 것이 충상호형이며 이는 수형자의 복역장소에서 그대로 집행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복역장소라 함은 유배된 본관을 뜻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역리가 직무태만으로 파면되고,「降爲常戶」가 부가된 경우에도418) 그 수형 장소는 역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② 는 충상호형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사료이다. 여기서 수형자의 신분이 승인이며 죄목도 같다는 점, 그리고 시기도 근접되어 있는 것을 비교해 볼 때「永充常戶」는 충상호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③ 의 사료에서는 전에 유배에 처해진 자 중 반역·불충불효·살인강도·모고겁살·삽면충상호자들은 사면에서도 제외되고 있는 점이 확인된다.419) 여기서 삽면충상호가 부가되어 있는 자들은 入島者들이 명백하며, 이들은 徐兢이≪高麗圖經≫에서 “죽을 죄라도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하고, 사면해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420)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사형이 면제되어 섬으로 유배된 자들일 것이다. 따라서「減死流配者」중에서 삽면충상호된 자를 제외한「其餘入島者」들은 出陸歸鄕 → 餘鄕者通朝見 → 朝見者敍用이라는 사면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사료를 일별해 보면 충상호형은 본관지·현거주지·유배된 섬 등 특정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집행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얼굴에 入墨이 부가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요컨대 고려 독자적인 행형체계는 그 근본적인 목적이 수형자의 거주지에 대한 강제적 이동이나 賤鄕에 永續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자격 박탈과 아울러 관인으로서의 재서용을 영원히 배제시키는 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려 나름의 독자적인 행형체계를 굳이 당률과 결부시켜 본다면 당률에서 제명·면관에 해당하는 죄를 고려에서는 귀향형·충상호형으로 처벌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률에 있어서 관인에 대한 처벌법규인 관당수속법을 고려적인 차원에서 수용하면서 그것을 고려의 실정에 알맞게 법제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10) | 이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들이 있다. 文炯萬,<麗代歸鄕考>(≪歷史學報≫23, 1964). 北村秀人,<高麗時代の歸鄕刑·充常戶刑について>(≪朝鮮學報≫81, 1976). 浜中昇, 앞의 글. 蔡雄錫,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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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 鎭人에 대해서는 ‘命州鎭入居軍人 例給本貫養戶人’이라 하여 本貫지역에 田丁과 養戶를 지급받고 兩界州鎭에 入居한 군인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문종 27년 3월 命). |
412) | 한편 노비의 귀향죄 적용 여부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상충되어 있다. 우선 귀향형의 대상이 된다고 보면서도 노비의 本貫所有를 인정하는 견해는 귀향을 流本貫으로(文炯萬, 앞의 글, 30쪽), 노비의 본관소유를 부정하는 견해는 천민집단의 거주지인 鄕으로 유배되었다고(北村秀人, 앞의 글, 449쪽) 각각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노비는 귀향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는 浜中昇(앞의 글) 및 蔡雄錫(앞의 글) 등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필자는 후자의 견해가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
413) | ≪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
414) | 北村秀人, 앞의 글. |
415) | ≪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4월 계해 및 권 23, 世家 23, 고종 22년 9월 계해. |
416) | ≪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
417) | 고려시대 畏懼致死罪는「脊杖配島」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高麗史≫권 95, 列傳 8, 王寵之). |
418) |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숙종 8년. |
419) | 고려시대의 赦免에 대해서는 辛虎雄, 앞의 책(1986), 231∼260쪽 참조. |
420) | 徐兢,≪高麗圖經≫권 16, 官府 囹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