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란의 성격
난중 크고 작은 많은 반란들이 모두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옥과·순창의 작란사건은 반도들이 군인신분으로 작당하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비천한 신분층이었다. 이들이 관사와 형옥을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한 것은 단지 평소 누적된 지배층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라를 전복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 왕자 등의 납치사건도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 국경인이 全州府吏였다는 점으로 보아 중인계층의 신분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고향 전주를 떠나 함경도 변경으로 유배된 이후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차별 대우를 받아 오던 도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획책했던 것도 쌓였던 울분을 풀어보자는 데서 출발했던 것이다. 또한 김희·강대수·고파 등의 반란사건도 作黨群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이미 왜란초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에 난민들이 노비문적이 보관되어 있는 刑曹와 掌隷院을 불지른 데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반란은 직접 중앙정부의 전복을 위한 투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은 그 양상이나 성격에 있어 판이하다. 그것은 왜군이 이미 남쪽으로 물러난 다음이라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며, 반란의 주모자가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부를 타파하고 새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유진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왕의 악정이 고쳐지지 않고 붕당이 해소되지 않으며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워서 백성들이 편치 못하다는 점을 일깨워 천명을 개혁하여 치세를 실현하겠다는 혁명의식을 제시했다. 이몽학은 ‘安民正國’을 내세워195) 고생하는 백성들을 물불 속에서 구출하겠다는 구호 아래, 직접 중앙정부를 상대로 하여 난을 일으켰다.
반민구성원을 분석하면 그 중 일부는 불평사족과 무인배가 끼어 있다고는 하나 대다수가 피지배층인 농민들이었으며, 반적의 두목으로 지적되는 인물은 모두 서얼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송유진은 본래 서울 庶族으로 通事 宋大春의 아들이었고,196) 이몽학은 宗姓孽裔이며, 함께 모의한 한현·權仁龍·金時約 등도 모두 서자였다.197)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해 주어지기는 하였으나 난국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널리 열려 있지 않았다. 임진란 초기에 의병활동에서 주도인물들은 거의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 가닥 신분상승의 기회마저도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納粟事目>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을 통하여 신분이 상승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활동하던 사람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이산겸과 김덕령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갖게 된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취했던 조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산겸이나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활동을 하여 衆望이 높았고, 또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치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