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국운영의 특징
정조대의 정국운영 역시 영조대처럼 일관되게 군주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추구되면서, 영조 치세에 탕평정책의 성공을 위해 실시했던 제반 제도의 개혁과 운영원칙의 변화들을 대체로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서 보다 합리적인 관료제 운영을 위한 방침의 변화와 법제화 작업이 있었다.
첫째로 재상의 정책결정권 강화이다. 정조는 淸議·峻論을 표방한 관료세력을 중심으로 의리를 조제하고 인재를 보합하려 했다. 산림세력을 영조대보다 존중하기는 했으나 이는 홍국영 당시의 일이었을 뿐이었고, 정조의 통치방식은 아니었다. 곧 산림세력은 정치에 간여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에 간여했던 산림 송덕상·송능상·김종후·홍양해와 이들을 지원했던 세력은 모두 의리문제에 저촉되었다고 비판을 받고 도태되었다. 반면에 이 시기에 낙론계 산림 金亮行과 호론계 산림 權震應 계열은 홍국영과 연결하여 노론정권을 만들려 했던 세력들을 비판하고 중립적 입장을 지켜서 정조의 호평을 받았는데, 이들의 후계자 중에서 후일 순조 연간 이후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나오기도 했다. 사림의 공론을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로 인정되는 당하관 청요직의 통청권 역시 영조 연간처럼 허용되지 않았다. 이조낭관의 통청권은 일시 복구되었으나 다시 폐지되었고, 한림의 자대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정조 득의의 탕평이 실시된 이후에는 영조가 탕평을 지키기 위한 4대사업이라고 표방했던 이조낭관·한림·산림·균역 시책 모두가 영조 연간에 결정된 그대로 지켜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영조 연간 재상권과 군문의 강화 이래 계속 강화되었던 비변사의 위상은 재상권 아래 어느 정도 통제되는 조처가 취해졌다. 비변사의 결정사항을 의정대신이 다시 議를 붙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관행이 강화되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영조 연간과는 달리 외척의 정치간여 배제와 학문 정치론 등 기본적 정치의리에 투철한 세력을 중용한다는 원칙이 지켜졌다는 점도 중요하다. 곧 정조 즉위 초에 남당과 북당으로 불려지는 외척이 주도하는 정파를 모두 와해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즉위 공신인 홍국영이 누이를 元嬪으로 들여보내 왕실 외척으로서의 입지를 만들고 산림세력의 인정을 받아서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는 등 권력 독점의 뜻을 보이자 갑자기 정계은퇴를 시켜버렸던 것이다.
둘째로 중앙정부에 의한 지방지배 강화이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영조 연간에 강화된 비변사 팔도구관당상제가 계속 실시된 외에도, 정조 연간에는 특별하게 강화된 어사제도가 있었다. 정조는 재위 25년 동안 암행어사 57회, 일반어사 56회, 도합 연평균 4.6회의 어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어느 국왕보다 많은 횟수이다. 특히 암행어사는 규장각에서 양성한 신진세력인 30대 전후의 초계문신들을 주로 파견하였다. 또한 정조 7년 이후는 대부분의 어사에게 친히 봉서를 내려 직무범위와 권한을 부여하면서 각별한 기대와 염탐 사항과 유념할 조건 등 특별한 관심 사항의 파악을 지시하고 있었다. 백성의 동향과 邑弊·民瘼의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려 하였다. 또한 어사가 담당하는 栍邑 중심 뿐만 아니라 파견되는 沿路에 있는 諸邑까지 감찰하게 하였다.104) 곧 경기도를 중심한 지방담당관 전체와 지방행정 전반을 감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지방수령의 보호와 견제라는 양면성이 있다. 특히 정조 연간에는 사회적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파악하는 암행어사의 특별보고서인 별단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이는 民隱에 대한 파악과 해결방안 모색이 암행어사 임무의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應旨民隱疏를 수집하여 지방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수령·방백에게 사회모순을 진언하게 한 것도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곧 이를 바탕으로 지방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는 성장하는 사회세력과 발전의 성과물에 대한 지배층의 동태적인 파악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셋째로 기층세력의 저항을 포함하는 사회변화를, 국왕이 직접 파악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승정원에서 담당하는 상언제도와 형조에서 담당하는 격쟁제도를 활성화하여, 일반 백성의 고통인 民隱을 직접 국왕에게 제소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정조 원년(1777)에는 국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動駕 때에 연도에서 백성들이 직접 쟁을 두드려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인 衛外 격쟁이 허용되었다. 이후 국왕의 행차가 쉬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올리는 상언과 쟁을 두드려 호소하는 격쟁이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정조 9년부터는 일반적인 민폐 사항도 상언과 격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전까지는 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원 및 顯揚·立後·山訟 같은 유교적 윤리에 관계되는 문제가 위주였다. 일반 민폐의 구체적 모습은≪日省錄≫에 일부 수록되어 전해진다. 중심되는 내용은 三政과 잡역 같은 부세 수탈문제, 토지 소유권과 지대 같은 토지문제, 禁亂廛權과 공인권·商圈대립 같은 상공업문제, 壓良爲賤·徵債濫徵·濫刑貪臟 같은 사회문제들이 중심이었는데, 국왕이 이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파악하여 판결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즉위 24년간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34회의 대민 접촉을 하고 있기도 했다.105)
정조 22년에 있었던 應旨農書의 수집 역시 농촌지식인의 체험과 실력을 활용하여 小農경제의 활성화를 모색한 것이다. 이는 세종때≪農事直說≫ 편찬과 같이 우리 실정에 맞는 자체적인 농업기술을 종합화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또한 국가 공사에 주로 ‘募軍’을 활용함으로써, 토지에서 배제되어 떠돌아다니는 몰락 농민계층인 유이민 집단의 활용과 정착을 도모하였다. 이는 특히 수원성 축성 당시에 관료들이 건의했던 백성의 부역 동원을 거부하고 모군만을 활용하기를 고집한 것과, 수원성에 장용외영을 설치하면서 동시에 향군의 편성을 강화한 점에 그 연관관계가 잘 나타나고 있다. 考功法을 제정한 것, 그리고 정조의 죽음으로 실시되지는 못했지만 노비제도 혁파를 추진한 것도 크게 볼 때는 몰락한 생산담당자층에 대한 시책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로는 성장하는 중간계층을 국왕과 직접 연결되는 세력으로 재편성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서학 실천운동 세력에 대한 온건 탄압책으로, 이에 연관된 남인계 인물과 역관 및 서민층을 보호한 점이라든지, 규장각을 강화한 결과 중인계층인 규장각 검서관과 평민에 가까운 서리 계층에서 북학파나 위항문학을 대표하는 실력자가 배출된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또 중앙의 지방 지배 강화로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한편 士族 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동요하고, 새로이 대두한 新鄕族과 吏族들이 수령과 연결되면서 향권을 담당하는 실력자로 대두하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106) 상업정책으로 실시한 辛亥通共 정책도 이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이제까지 지주적 생산물을 취급하면서 국가재정과 밀착되어 있었던 시전상인들의 독점판매권인 금난전권을 혁파한 정책이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당시 난전 경영으로 가장 사회문제가 되었던 계층은 소상인·군소 수공업자들 및 관청의 노비·평민 출신 군사들이었으므로, 이 시책은 이들을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보다 활발해진 농민적 생산물을 취급하는 소상인을 포함한 성장해 가는 私商들에게 도성에서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하도록 허용한 조치였다.
곧 전체적으로 볼 때, 정조대 탕평정책도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강화로 효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도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붕당을 와해시키고, 왕실 외척세력을 포함하는 특권적 양반 벌열가문을 설립하려는 정책이었다. 다음에는 국왕 중심으로 성장계층을 재조직하려 했던 사회체제 개편 시도가 뒤따랐다. 정조대 탕평정국에서는 새로운 청요직인 규장각 건설과 국왕 친위군영의 강화로 군주권 및 집권적 관료제의 강화가 이루어진 점, 도시와 농촌에서 성장해 왔던 향반이나 역관·서얼·상인세력 같은 중간계층의 성장을 정치구조 속에서 수용하려는 노력들이 기울여진 점, 유이민과 노비계층의 안정과 지위 향상 노력이 탕평적 정국운영론 속에서 수용되었던 점들이 특히 주목된다.107)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규장각을 통하여 성장한 국왕 측근세력이 강화되어 가는 반면, 재야 산림세력의 지지를 받는다고 자부하는 벽파세력이 이를 강력하게 견제하는 등 권력기반의 축소와 권력투쟁 현상이 일어났다. 그런데 탕평책은 붕당 자체를 타파한다는 표방으로, 붕당이 권력집단에 대한 견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정국운영 원칙이기도 했다. 따라서 붕당의 지도자인 산림세력을 권력집단에서 배제하였고, 그들의 의리주인으로서의 입지에 타격을 주었다. 또 외척의 정치간여를 금지하여 관료세력과의 연결성을 차단하는 정책을 써서, 붕당을 고수하는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계속 약화시켰다. 관학 진흥책과 학연의 분열도 붕당 내의 결속을 와해시켜 갔다. 이렇게 붕당의 기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발생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벽파세력이 탕평정국을 파기시키는 ‘환국’ 형태의 정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권력 기반 자체가 극도로 축소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후 국왕의 ‘세도’ 위탁이라는 명목으로 정국운영권 자체가 왕실 외척가문 주도 아래 몇몇 경화벌열로 구성된 특권적 권력집단에만 집중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勢道政治였다.
104) | 韓相權,≪朝鮮後期 社會와 訴寃制度≫(一潮閣,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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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 韓相權, 위의 책.≪日省錄≫에서 3,217건,≪正祖實錄≫에서 2,671건의 상언과 격쟁이 접수·처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
106) | 金仁杰,<조선후기 향촌사회 권력구조 변동에 대한 시론>(≪韓國史論≫23, 서울大, 1988). |
107) | 李泰鎭, 앞의 글(1993)에서는 정조 연간이 집약농업 및 상업자본의 발전으로 정치 중심지가 상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점, 정조 연간 노비신분 해방추진, 서얼·역관·향반같은 성장해가는 중간 계층과 직접 연결을 도모한 탕평정책 추진에 주목하여, 시민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군주권이 일반 민인들과 직접 연결을 도모했던 계몽절대주의의 성격을 가졌다는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