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중사상의 확산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 민중사상은 鄭鑑錄思想이다. 정감록은 風水圖讖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풍수도참 관련 예언은 왕조나 왕권의 교체기, 정치사회적 변동기에 자주 등장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풍수도참과 관련한 각종 서책들이 넘쳐났고, 이에 따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 태종·세조·예종·성종 때에는 書雲觀에 소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민간에서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풍수도참 관련 서책까지도 모두 焚書하도록 하였다.080)
정감록은 조선 초기부터 ‘鄭氏’, ‘鷄龍山’ 등 반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구조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모순이 심화되어 가던 시대상황 속에서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기존의 풍수도참을 현실에 맞게 정리하여 ‘정감록’을 만들어 내고 이를 유포하였다.081) 그리고 정조 때에는 ‘한글판 정감록’이 나돌 정도로 정감록은 민간에 널리 유포되고, 이는 곧 민중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감록은 선조 때부터 정조 때에 이르는 어느 시기에 혁명운동의 필요로 자료를 민간신앙 방면에서 취하여 未來國土의 희망적 표상으로 만들어 낸 듯 하다”082)는 견해는 타당하다.
‘정감록’이라는 이름은 영조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감록이 특정한 서책이나 논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정감록을 전래의 비기·도참의 논리 중에서 현실과 결부시켜 예언한 사상의 총체로 이해하고, 이에 따라 정감록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첫째, 정감록은 현실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직관하고, 이의 타파를 염원하고 있다. 흔히 정감록의 正本으로 불리는<鑑訣>에는 이러한 논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부자는 돈과 재물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 같고, 가난한 사람은 일정한 직업이 없으니 어디를 간들 빈천하게야 살지 못하랴”,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는 등의 표현처럼,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따라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만일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태수를 죽이고도 조금도 꺼리낌이 없고, 상하의 분별이 없어지고 綱常의 변이 잇따라 일어난다”, “사대부의 집안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 집안은 탐욕으로 망할 것이다”는 등 신분사회에 대한 적대감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정감록 사상이 현실사회의 구조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 것은 민중의 정서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신분제도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 구조,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직접 겪고 있었고, 정감록 사상은 이러한 민중의 정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둘째, 정감록에는 사회경제적 모순이 가중되어 가는 현실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전할 길을 찾으려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이것은 당시 전란에 대한 민중의 공포감을 반영한 것으로,<감결>에는 난리를 당했을 때 일신을 보전할 수 있는 곳으로 ‘十勝地’라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는 “병화가 미치지 않으며 흉년이 들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끼리 만나서 결혼하고 형제들이 화기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이 난리로 나타날 것에 대해 민인들이 심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가중되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중의 열망을 담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현실의 모순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고, 이를 타파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정감록이 갖고 있는 논리의 한계이며, 당시 민중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이다.
셋째, 정감록 사상에는 왕조교체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역성혁명사상의 논리가 구체화되어 있다. 즉, “鷄龍山 아래 도읍할 땅이 있어 鄭氏가 나라를 세우리라. 그러므로 福德이 李氏에게는 미치지 않으리라”083)고 하여, 이른바 ‘李亡鄭興’에 의한 역성혁명사상을 담고 있다.<감결>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沁이 말하기를 白頭山에서 내려온 脈運이 金剛으로 옮아가고 太白·小白에 이르게 되니 山川鍾氣가 鷄龍山으로 흘러들어 가서 鄭氏의 팔백년 도읍지가 될 것이고, 그 후에 伽倻山으로 흘러들어 가니 趙氏의 천년 땅이 되고, 다음으로 全州 范氏의 육백년 땅이 된다. 松岳에 이르면 王氏가 도읍을 부흥할 것이다(安春根編,≪鄭鑑錄集成≫, 亞細亞文化社 影印本, 1981,<鑑訣>).
여기에서는 역성혁명의 구체적 대상뿐만 아니라 각 왕조의 교체순서 및 왕조의 존속기간까지를 풍수지리설로 풀어서 설명했다. 정감록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존속기간이 보통 300∼500년 사이로 설정되어 있어 18세기는 조선왕조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시기에 해당한다.084) 이러한 ‘이망정흥’과 ‘鄭氏가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내용은 거의 모든 정감록류의 비기에 나타나 있을 만큼 정감록 사상의 기본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혁명의 구체적 실현 방법은 계룡산 도읍의 주인이 정씨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났듯이, 鄭眞人이라는 메시아적 인물의 출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넷째, 이와 관련하여 ‘海島起兵說’은 정감록 사상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저항 논리로 기능하였다. 해도기병설은 진인이 해도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와 현재의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 즉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진인은 도를 닦아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용력이나 무술이 뛰어나며, 나라를 차지하거나 세상을 구하는 성스러운 과업을 담당할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085) 그러므로 해도기병설과 관련된 진인의 존재는 해도의 군사를 이끌 군사지도자로서의 의미와 함께 민중의 현실적 고통을 구제할 수 있는 메시아적 인물로서의 의미가 함께 있다.
이러한 해도기병설이 민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현실성과 관련된 문제로, 당시 해도에 둔취해 있던 민인들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도망노비나 유민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해도로 몰려들어 저항세력화하고 있었다. 이 때의 해도세력의 존재가 해도기병설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해도의 저항세력을 정감록에서 말하는 해도의 군사로, 그리고 저항세력의 우두머리를 정감록의 진인으로 설정할 수 있다. 둘째로 해도기병설은 이상사회 구현의 문제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이상사회 문제는 체제모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중의 폭발적 에너지를 수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해도기병설에서 제시된 이상사회는 비현실·비합리·비과학적인 논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약점은 적어도 온갖 현실의 고통과 좌절을 일상적으로 겪는 민중에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얼마나 민중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는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도기병설의 도달점, 즉 진인에 의해 구현된다고 믿고 있는 이상사회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이른바 ‘南朝鮮信仰’의 검토를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崔南善은 남조선신앙에 대하여, “우리의 앞에는 남조선이 있어서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우리를 그 곳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면 지금 시달리고 졸리는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바라고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게 되는 좋은 세월을 맞이하게 된다”086)는 논리로 설명하였다. 즉 최남선은 남조선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상사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민인들은 남조선을 “남해의 가운데 제주도 밖에 있는 지역으로 매우 넓고 토지가 기름져 살만한 곳”087)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남조선은 ‘민중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래의 조선’, 즉 해도기병설에서 추구하는 도달점인 이상사회 그 자체로 민중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한편 彌勒信仰도 민중사상으로 기능했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 이후의 세계를 주관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숭배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 미륵불은 未來佛이며 말법의 시대에 마땅히 나타날 當來佛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흔히 변혁의 논리로 이용되는 彌勒下生信仰은 말법의 시대에 미륵이 지상으로 내려와서 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레에 걸친 법회(龍華三會)를 열 때 여기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신앙의 참 뜻은 단순히 도솔천에 왕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륵의 하생을 기다려 용화삼회의 설법장에 참여하여 모든 중생이 구제받는데 있는 것이다.088)
조선시대는 종교, 사상적으로 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崇儒抑佛策’의 기조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불교가 왕실과 사대부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신봉되기는 하였지만 점차 쇠퇴하였으며, 중기 이후에는 국가·사회적 성격이 약화되고 민중의 종교로 명맥을 유지하여 갔다. 정부의 억불정책은 불교의 대중화 내지는 민중화를 촉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민중과 함께 했던 것이 미륵신앙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체제모순이 심화되고 사회변동이 촉진되면서 미륵신앙은 민중 사이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이 때 미륵신앙에는 크게 고통받는 개개인을 구원해주는 기복신앙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새로운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변혁사상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먼저 개인이나 집단이 사사로이 복을 기원하며 신앙행위를 하는 경우로, 이 때는 흔히 주술적 성격을 띠면서 민간신앙으로 전개되었다.089) 민간신앙으로 전개되는 미륵불의 신앙형태와 그 기능은 여러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득남을 기원하는 신앙행위가 이루어졌다. 이는 바위 등 자연물을 대상으로 득남을 기원하던 전래의 풍속이 미륵신앙으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 치병을 기원하였다. 샤머니즘적 사고에서 비롯된 치병에 대한 기원행위가 계속되면서, 한편으로는 미륵불을 대상으로 치병을 염원하였다. 셋째 수호의 기능으로 주로 마을 단위로 행해졌다. 이 또한 전래의 마을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넷째 기복신앙으로, 기존의 기복신앙에 불교적 색채가 더해져 일월맞이 때 미륵에 치성드리는 행위, 장승이 미륵으로 불교화되는 현상 등이다. 이 밖에도 미륵신앙은 흔히 무속과 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미륵을 ‘萬神’이나 ‘七星님’·‘미륵님’으로 부르는 경우, 미륵이 山神閣이나 七星閣에 모셔지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미륵불에 대한 숭배를 통하여 개개인의 현실에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소승적 입장이다. 그러므로 이 때 미륵신앙의 주체는 승려나 미륵경전을 공부하는 전문적 미륵신도들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미륵불에 치성을 드림으로써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이루려는 일반 민인들이다. 이들은 불교, 즉 미륵신앙을 고등종교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민간신앙과 다름없이 받아들였다.
다음은 미륵신앙이 갖는 변혁사상으로서의 기능이다. 미륵불은 말법의 시대에 출현할 未來佛이다. 그러므로 미륵불은 현세에 고통받고 있는 민중에게 이상사회의 구현에 대한 희망을 주는 ‘希望佛’로서의 성격을 갖는다.090) 민중이 이상사회에 대한 희망을 미륵신앙을 통하여 구현하려는 것은 미륵신앙이 사회변혁사상으로서 합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때 미륵신앙의 변혁사상으로서의 성격은 주로 미륵하생신앙 속에 있다. 민중의 이상사회 구현에 대한 희망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龍華三會를 통한 용화세계를 구현할 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미륵하생신앙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 사후 56억 8천만년이 지나서야 도솔천에서 인간세상으로 하생하여 용화삼회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현한다고 한다. 물론 이 세계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온갖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이상세계이다. 그러나 미륵불의 출현 시기를 56억 8천만년으로 설정한 것은 현실의 질곡에서 당장 벗어나려는 민중에게는 공염불로 들릴 뿐이다. 그들은 미래불이며 당래불인 미륵불이 현실에 출현하기를 바랐으며, 사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를 통하여 용화세계라는 절대평등사회이며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을 구현하려 했다. 이러한 미륵하생은 현실세계를 인정하는 데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질곡의 세계인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미륵하생신앙은 그 자체로 메시아의 출현이라는 혁명적 이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이와 같은 미륵신앙의 논리를 내세워 민심을 끌었던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미륵신앙이 민중불교를 대표하며 민인들 사이에 확산될 때, ‘生佛信仰’도 민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생불신앙은 민중운동의 사상기반으로 이용되었다. 이 때 생불신앙은 승려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흔히 무녀들에 의해 주재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흔히 무녀들이 ‘생불’을 일컬으며 妖言을 퍼뜨리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091) 그러므로 생불신앙은 민중불교와 무격신앙이 얽혀 있는 민중사상의 범주에 해당한다. ‘龍信仰’도 민간신앙 내지 민중사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민간신앙에서의 龍은 물을 지배하는 水神으로 신앙되면서 기우를 비는 대상신이었다. 또한 용은 미륵불의 출현 직전에 흉년과 재해가 넘치는 사회를 다스리며 미륵불의 강림을 예비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용신앙은 무녀들 사이에서 널리 신봉되었고, 민중운동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민중사상으로 떠올랐다.
道敎도 민중사상의 성격을 일부 지니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도교는 齋醮를 위주로 하는 科儀的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도교 행사에 대한 논란 끝에 중종 때 국가의 공식 기구인 昭格署가 혁파된 이래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은 크게 두 갈래로 나타났다. 첫째는 修鍊的 도교이 성격이 강화되었다. 수련적 도교는 엄격한 자기 수련을 통해 인간 생명력의 원기인 精·氣·神을 보전하는 방법 등으로 神仙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092) 조선 후기에는 도교수련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유랑 지식인’들은 도술을 수련한다는 명목으로 산수를 떠돌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어울려 도맥을 형성하며 사승관계도 맺었다.093) 이 때에는≪海東傳道錄≫·≪靑鶴集≫과 같이 도인들의 활동이나 사승관계를 밝힌 책들이 널리 읽혀졌다. 둘째로 본래 민간신앙과의 습합 속에서 생겨난 도교가 이 때 들어 민간도교적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민간신앙과 도교에서 신앙하는 神의 존재가 일치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도교의 城隍·七星·竈王神 같은 경우는 도교 쪽에서보다 민간신앙 쪽에서 더욱 신앙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도교의 두 갈래 흐름 속에는 정감록 사상과 같이 민중운동의 사상적 배경으로 삼을 만한 저항적, 변혁적 요소는 많지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민중사상을 기반으로 일어난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는 도교적 요소가 적지 않다. 이 때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神仙術’이나 ‘長生術’에 가탁하는 방법으로 민심을 끌었다. 이들은 仙人이나 神人들이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점을 전파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스스로 선인이나 신인의 행세를 하였다. 아울러 민중운동의 주체들은 도교의 한 부분으로 통하는 縮地術이나 遁甲術 등을 이용하였다. 이들은 ‘呼風喚雨’나 ‘虛步法’ 등을 구사하는 초인적 능력의 소유자로 통했다.
天主敎는 기존의 민중사상과는 또 다른 성격의 민중사상으로 부각되었다. 천주교는 정조 8년(1784)에 공식 수용된 이래 그 세력을 빠르게 확장시켜 나갔다. 이 때의 주역들은 李承薰·李蘗·丁若銓·權日身 등 이른바 ‘星湖左派’ 계열의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異端邪說의 일종으로 파악했고, 정조 15년의 ‘珍山事件’으로 國禁을 공식화했다. 이는 전라도 진산에서 양반 尹持忠과 權尙然이 북경 주교의 지시에 따라 조상의 神主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을 말한다.094) 이 사건은 유교 제일의 사회윤리인 ‘孝’를 송두리째 뒤집었다. 정부에서 볼 때, 그들은 ‘無父無君’·‘滅倫敗常’의 무리일 뿐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辛亥迫害’의 계기가 되었다.
천주교는 정부의 금지 속에서도 계속 교세를 확장해 갔고 점차 민중지향적 성격을 띠었다. 천주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평등사상’과 같은 민중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교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도 “천주교도들은 비록 노예와 천인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형제처럼 대하여 신분의 차이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빠져든다”는 인식을 가질 정도였다. 아울러 천주교 확산의 또 다른 계기는 이러한 사상을 민중에게 올바로 전달해줄 한글 번역본 천주교 서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학’은 都下에서 시골에까지 퍼지고 아무리 ‘田氓’이나 ‘村夫’라고 할지라도 그 책을 諺文으로 베껴 神明처럼 받드는 현상이 일어났다.095)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부에서는 천주교도들을 ‘思亂’·‘變世’의 마음을 가진 자들로 인식하고 그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천주교도를 효율적으로 사찰하기 위해 기존의 향촌 조직망인 五家作統法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에 천주교도는 비밀결사화하고 있었으며, 천주교는 일종의 민중종교운동의 성격을 띠었다.096)
080) | 梁銀容,<鄭鑑錄信仰의 再照明>(≪傳統思想의 現代的 意味≫,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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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 李能和,≪朝鮮基督敎及外交史≫하, 3장 鄭鑑錄迷信之由來, 18∼19쪽. |
082) | 崔南善,≪朝鮮常識問答≫(三星文化文庫 16, 1972), 161쪽. |
083) | 安春根編,≪鄭鑑錄集成≫(亞細亞文化社 影印本, 1981)<三韓山林秘記>. |
084) | 우 윤,<19세기 민중운동과 민중사상>(≪역사비평≫2, 1988), 248쪽. |
085) | 조동일,<진인출현설의 구비문학적 이해>(≪韓國 說話와 民衆意識≫, 정음사, 1985), 87쪽. 한편 張泳敏은 용력이나 무술이 뛰어난 존재는 將軍이며, 진인에게는 이러한 성격을 찾기 힘들다고 하였다. 아울러 진인은 ‘天師’의 역할을 담당하는 존재로서 하늘의 명에 따라 민중을 구원할 구원자라고 하였다(張泳敏,≪農學農民運動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5, 80∼81쪽). |
086) | 崔南善, 앞의 책, 162∼165쪽. 그는 여기에서 남조선을 “본래 조선민족의 현실고에 대한 정신적 반발력으로부터 만들어낸 하나의 이상사회 표상이며, 어의상으로 보면 朝鮮語에 南을 ‘앞’으로 새기니 남조선이란 전방에 있는 조선, 곧 미래 영원의 조선을 나타낸 것으로 언제까지나 희망으로 품는 조선”이라고 하였다. |
087) | ≪雞鴨漫錄≫坤, 奎 가람 古 813.08 G997m. |
088) | 洪潤植,<韓國史上에 있어 彌勒信仰과 그 思想的 構造>(≪韓國思想史學≫6, 1994), 81쪽. |
089) | 金三龍,≪韓國彌勒信仰의 硏究≫(同和出版公社, 1983), 184∼199쪽. |
090) | 洪潤植, 앞의 글, 74∼76쪽. |
091) | ≪受敎定例≫妖邪惑衆二條. |
092) | 金洛必,<海東傳道錄에 나타난 道敎思想>(≪韓國宗敎≫9, 1984), 106∼109쪽. |
093) | 車柱環,≪韓國의 道敎思想≫(同和出版公社, 1984), 143쪽. |
094) | ≪正祖實錄≫권 33, 정조 15년 11월 무인. |
095) | ≪正祖實錄≫권 26, 정조 12년 8월 신묘. |
096) | 趙 珖,≪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137∼142·172∼17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