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Ⅱ. 18세기의 민중운동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유대관계의 강화

 민중이 그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에 불만을 갖고, 나아가 봉건지배층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봉건적 사회구조가 갖는 모순을 각성했다고 하여도, 그들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으로 구체화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봉건적 질서가 완강히 그들을 억압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억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주체적 역량이 성숙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 있어 보여진 민중세계의 각성은 다음 시기에 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중운동의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민중세계의 각성은 이 시기에는 행동으로 구체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민중의 저항의식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었으며, 변혁의 주체로서 나서기 위한 틀을 예비시키고 있었다. 고통에 허덕이던 민중은 개별적이고 간헐적인 抗租나 掛書 또는 群盜나 變亂에의 참여를 통해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탈출해 보고자 하였다.

 한편, 그들은 보다 근원적으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을 전개하고자 했다. 개별적이고 간헐적인 힘을 강인하게 집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공동체적 조직인 두레나 契가 그러한 시도의 결과로, 이들 조직은 민중의 지위와 역량을 강화시킴에 있어 중요한 토대로 역할하였다. 민중은 자율적으로 마련한 이들 조직을 통해 봉건지배층의 통제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니, 이들 조직은 새로운 질서를 의도한 민중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이기도 했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래 이앙법의 보급을 계기로 대두한 두레는 농민들의 향상된 경제력을 발판으로 조직의 구성에서 지주층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였으니, 강인한 조직력과 자율성을 토대로 그들의 지위와 역량을 강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188) 따라서 그 발달은 민중의 삶에 장애가 되고 있던 봉건적 질서를 깨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두레가 생겨나기에 앞서 농촌사회에는 香徒라는 지역공동체가 있었다. 고려말 休閑法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자연촌락 단위로 그 규모가 작아진 향도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벼농사에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황두라고도 불리는 향도는 김매기에 능한 장정 20∼30명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정되는데, 능률적이고 규율적이었다. 조선 전기에 이르러서는 수리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서 벼농사는 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 향도는 곧 직파법에서 김매기에 동원된 공동 노동조직이었다. 그러한 향도가 이앙법이 보급되어 보다 강도높은 노동력이 요구되면서 공고한 결속력을 갖는 두레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189) 즉, 자체의 조직적 개성이 강한 인위적 두레가 나타나면서 종래의 자연촌락에 토대한 향도와 같은 공동체적 질서는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두레는 이모작이 보급되면서 그 비중이 더욱 높아졌다.

 두레는 농사작업을 공동노동에 의해 수행하면서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는데, 農樂과 農旗는 규율적 행동과 유대관계를 조장하였다. 두레의 조직은 한 마을의 16세 이상에서 55세 이하의 성인남자를 구성원으로 하여 평균 20∼30명으로 이루어졌다. 큰 두레는 약 50명으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두레의 구성원은 흔히 두레꾼, 두레패라고 불렸다. 두레는 반드시 자연촌락인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다. 행정단위로서의 洞과 里는 두레 조직의 단위가 아니었다. 두레 가입에는 전체적, 의무적 성격이 있어 공동체적 구속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양반이나 지주 등 비생산 노동계급은 두레에서 배제되었으며, 대신 머슴을 두레에 참가시켰다. 즉, 두레는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건실한 농민으로 구성된 민중의 작업 공동체였다. 두레는 반드시 농기와 농악이 있었는데, 농기는 두레의 상징으로 농민의 자부심과 단결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그리고 농악은 공동노동에서의 노동능률을 높이고 노동을 즐겁게 하며, 두레를 작업공동체로 단결시키는데 기능하였다.

 두레가 이와 같이 공고한 결속력과 농민의식의 함양에 기능하였다고 할 때, 농민의 지위와 역량은 이를 통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한 기능은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농민층이 분화하는 갈등구조 속에서 보다 강렬하게 발휘하여, 농민들이 그들의 삶을 주체적으로 의식하고 개척해 나감에 있어 역동적으로 활기를 부여해 주었다.

 정부에서도 이 점에 유의하여 두레의 동태를 주목하고, 통제하고자 하였다. 영조 13년(1737) 湖南別遣御使로 임명된 元景夏는 두레의 농기와 농악기가 민중의 소요시에 이용될 수 있다고 하여 압수한 바 있다.190) 이 때는 戊申亂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때이어서 각지의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조직력, 자율성, 규율성이 강한 조직체가 형성되어 갔다고 하는 것은 이 시기 민중의 지위를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논농사에서 두레를 이용하여 공동노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 밭농사에서는 품앗이라는 공동노동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191) 품앗이는 소겨리, 들계 등의 이름으로 15세기 이래 존속되고 있었는데, 소겨리는 밭갈이를 함에 있어 소를 가진 집을 중심으로 5호 정도가 하나의 노동조직을 이루었다. 그리고 들계는 김매기에 있어서 함께 노동하는 조직으로, 자연촌락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큰 마을에는 4∼5개의 들계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품앗이 조직도 두레와 마찬가지로 공동노동조직으로서, 노동의 능률을 높이는데 기여하였으나, 조직력이나 자율성에 있어서는 두레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들 조직 역시 농민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사회의식을 키우는데 나름대로 이바지하고 있었다.

 두레나 품앗이에 의해 노동력이 집약되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그러한 농민층의 이익을 분점하고자 국가가 수취체제를 里·洞 단위의 共同納 제도로 전환하여 간 것이 18세기였다. 이에 농민들은 그 부담을 완화하고자 각종의 계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 조직체인 계는 농민간의 상부상조를 위해서도 요청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사회의식의 결집으로서도 활용되었다.192) 17세기 이래 농민층의 분화로 인해 유민이 다수 발생하였다. 그들은 도성 주변으로 모여들었는데, 자신들이 대를 이어 살던 농촌에서 쫓겨나야 했던 운명이어서 지배구조에 매우 저항적이었다. 그리하여 劒契, 殺主契, 香徒契 등의 조직을 만들어 잦은 정변 속에서 특정한 정파의 무력 행사에 이용되기도 하였다.193)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두레뿐 아니라 계와 같은 조직도 성행하여 민중의 결속을 다졌다.

 두레나 품앗이 또는 계를 중심으로 농민들이 결집하여 주체적으로 행동해 나갔다면, 그것들은 곧 농민들이 대다수인 민중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 민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鑑訣思想이었다. 鄭鑑錄으로 대변되는 감결사상은 18세기 이래 특히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지배체제의 모순이 여러모로 나타나고, 그에 대한 반발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건지배층은 모순에 대한 근본적 대책을 강구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기능을 상실하고, 그것은 민중세계와는 거리가 먼 관념세계였다.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속에서 말세의 도래, 왕조의 교체, 변란의 예고 등 근거없는 감결사상이 유행하였다. 감결사상의 현실 부정적 성격은 당시 민중세계에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도 하였다. 감결사상은 현세에 대한 강한 거부의식과 더불어 理想鄕에 대한 추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194) 그리고 감결사상에서는 현세의 질곡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주고, 이상향의 도래를 가능하게 할 존재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조 24년(1748)의 李之署 事件, 영조 36년의 愼後一 사건, 영조 39년의 宋永興 사건, 영조 40년의 李達孫 사건, 영조 44년의 黃應直 사건 등은 모두 감결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하였으며, 더욱이 정조 6년(1782)의 文仁邦·李京來 사건에서는 정감록이 본격적으로 이용되었다.195)

 감결사상과 더불어 미륵신앙, 도교사상 등도 민중세계를 동요시켰다. 17세기 후반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미륵신앙운동은 영조 13년 황해도·강원도·경기도를 중심으로 확산되어 정계에 문제화된 바 있었는데, 기존의 질서나 이념체계에 매우 부정적이었다.196) 그리고 일찍부터 민간신앙으로 전승되어 온 도교사상도 반체제적 사상이었는데, 정조 9년(1785) 洪福榮·李瑮 등은 정감록과 함께 도교를 배경으로 조선왕조의 전복을 시도하였다.197) 이러한 민간신앙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는 않았지만, 고통과 불안에 허덕이는 민중세계를 현혹하면서 사회 저변으로 널리 확산되어 갔다. 즉, 이는 당시 민중의 정신적 피난처 구실을 하였으니, 민중은 감결사상 등을 통하여 저항력을 응집시켜 나갔던 것이다. 민중을 지배하고 있던 이같은 민간사상은 민중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삶의 새로운 방향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민중세계의 동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상치 않았다. 봉건적 사회구조가 모순을 드러내는 속에서 상품화폐경제가 진전되어 사회변동이 기층사회로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에는 농민층의 분화가 본격화하면서 몰락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은 현실세계의 모순을 직시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두레나 감결사상 등을 통해 응집력을 강화시켜 가면서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강화하여 새로운 사회를 주동할 힘을 구축해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지는 주체적 의식은 아직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잉태되고 있는 봉건질서에 대한 저항의식은 어느 시기에 이르면 결집되어 분출되게끔 갈등의 앙금은 나날이 보다 더 축적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향촌사회를 신분제적 지배를 통해 장악해 왔던 봉건지배층, 즉 在地士族의 지배력도 동요를 일으켰으니, 그것은 민중세계를 종래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봉건지배층은 향촌사회를 통제하고자 서원, 향약, 洞契의 기능을 강화해 보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그것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같은 사회적 움직임 속에서 한편에서 鄕權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선 잔반, 중인, 서얼, 노비, 농민 등 각계층의 동향 역시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188)신용하,<두레 공동체와 농악의 사회사>(≪문제와 시각≫ 13, 문학과 지성사, 1985), 225쪽.
189)李泰鎭,<17·8세기 香徒조직의 分化와 두레 발생>(≪震檀學報≫ 67, 1989), 21쪽.
190)≪承政院日記≫ 881책, 영조 14년 11월 17일.
191)李泰鎭, 앞의 글(1989), 14쪽.
192)金仁杰,<朝鮮後期 鄕村社會 統制策의 위기>(≪震檀學報≫ 58, 1984), 142쪽.
193)鄭奭鍾,≪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一潮閣, 1983), 23∼29쪽.
194)趙 珖,<朝鮮後期 思想界의 轉換期的 特性>(≪韓國史 轉換期의 問題들≫, 지식산업사, 1993), 167쪽.
195)高成勳,≪朝鮮後期 變亂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149∼155쪽.
196)鄭奭鍾,<朝鮮後期 肅宗年間의 彌勒信仰과 社會運動>(≪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1), 430쪽.
197)≪正祖實錄≫ 권 19, 정조 9년 3월 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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