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양반신분의 존속과 해체의 조건
앞서 인용한 바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의 의안은 명백히 ① 문벌 및 양반·상인 신분제도의 폐지, ②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법제화한 것이었다.624) 이러한 개혁입법은 곧 사상 최초로 반상제의 폐지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음을 의미하며, 이후 ‘반상의 등급’이 관습상에서 잔존하더라도 이제는 그 적법성을 잃고 다만 遺制에 지나지 않게 됨을 뜻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정부는 이 획기적 입법의 취지에 따른 반상제 폐지를 적극 추진하지는 못하였다. 정부는 같은 해 9월 9일(음력 8월 10일)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 등에 내린 關文에서 위의 입법내용을 “인재를 널리 뽑는 방법이며 전적으로 班閥만을 쓰지 않고 비록 常賤일지라도 진실로 그 재주가 있으면 參用하여 그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설하여, 법령의 취지를 그 후반부에 해당하는 ‘능력위주 인재 등용’의 측면에만 국한함으로써 반상제 폐지를 담은 개혁입법의 혁명성을 크게 완화하는 해석을 내렸다. 이는 신분제 폐지 이후 더욱 첨예화된 양반에 대한 신분투쟁을 완화하고 양반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의도에서 군국기무처의 법령을 수구적으로 왜곡하여 해석한 것이었다.625) 이 관문은 법령이 아니라 법령에 대한 해석상의 행정지시에 불과한 훈령이었지만, 이런 식의 해석이 가능하였던 그 자체가 반상제 폐지를 적극 추진할 수 없었던 당시 정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626)
실제로 반상제를 포함한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 당시 위 군국기무처의 법령 제정 때에만 혁명적으로 과감하였고, 그 이후는 매우 온건한 점진적 방법으로 완만하게 진행되었다.627) ① 동학농민전쟁이 농민군의 패배로 끝남으로써 밑으로부터 신분제 폐지를 감행할 세력이 꺾이게 된 점, ② 농민군 진압에 공훈을 세운 양반층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이들이 신분제 유지를 요구하고 봉건적 반동을 시도하는 압력을 가했던 점, ③ 대부분 양반신분 출신인 개화파 관료들이 개혁법령의 과감한 혁명적 집행을 회피함으로써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 등이 신분제 폐지를 적극 추진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특히 개혁법령이 순조롭게 시행되면 가장 타격을 입게 될 양반층은 개화파 정권과의 정면 대결을 선언하고 실천에 옮겼으며 결과적으로 개화파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을 저지·파탄시켰던 것이다.628) 이러한 사실은 조세행정에서 양반층이 누리던 특권을 없애고 사족 중심의 지방사회를 재편하려던 개화파정부의 시도가 양반층의 저항을 받으면서 좌절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629)
한편, 시각을 달리하면, 과연 반상제가 법령에 의해 실질적으로 폐지 가능한 성격의 것이었던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법제적 폐지의 가능성은 반상제 자체 또는 그 핵심 요소가 법적 제도로 성립되어 있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조선의 반상제는 성립 이후 관습·관행에 뿌리박은 관습적 제도로서의 성격을 다분히 가지게 되었다.630) 따라서 단기간의 법제적 조치에 의해 관습을 포함한 반상제의 근본적 폐지를 이루기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 ‘사회인류학적 이유’에 의한 갑오개혁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631)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갑오개혁에 의해 반상제가 즉각 철폐되지 못하고 그후에도 반상관계가 여전히 사회생활에서 주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632) 1905년≪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당시 정부에서 양반의 수효를 조사하였는바 서울 城內 北部의 경우 양반의 수가 800여 호에 달한 조사결과를 소개하면서, 이것으로 미루어 전국 인민 중에 양반이 족히 삼분의 일은 될 것이라 하고, 같은 나라 같은 겨레로서 ‘曰班曰常의 二種人族’이 있음에 따른 폐단을 비판하면서 양반에 대한 ‘처치방법’을 빨리 시행하는 것이 ‘安民하는 良策’이라고 논하였다.633) 이는 곧 갑오개혁 이후 대략 10년을 경과한 시점에서도 반상제가 청산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앞서 인용하였듯이 1899년의≪독립신문≫은 반상을 초월한 인재의 등용조차도 관습 속에 깊이 뿌리내린 반상의 관념을 청산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 1910년 당시 양반·유생의 행태에 관한 경찰국의 평가도 반상제의 사회적 기능이 그때까지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갑오개혁 이후의 사정을 1900년에 제정 러시아 경제성에서 발간한≪한국지≫는 다음과 같이 관찰하여 서술하였다.
1894년에 시작된 개혁의 시기에 발표된 정부의 법령들은 수백 년 동안 굳어온 한국민의 구조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귀족층과 다른 낮은 계층들을 평등하게 하고 노비를 해방시키고 문관의 무관에 대한 우월권을 폐지하고 백정·역정·광대들의 권리의 속박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의 많은 부분은 오늘날까지 死文이나 마찬가지이고 한반도의 생활은 법률에 어긋나게 예전의 관습적인 제도를 많이 그대로 지키고 있다(柳永益,<甲午更張과 社會制度 改革>, 朱甫暾 外,≪韓國社會發展史論≫, 一潮閣, 1992, 289쪽에서 재인용).
이처럼 신분제 폐지에 관한 개혁법령은 이후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여 거의 사문화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일반 사회생활에서는 여전히 관습상의 신분 유제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심지어 양반신분의 본래적 존립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던 식민지하에서조차 사회생활의 영역, 특히 혼인·언어·예절 등의 영역에서 여전히 반상을 따지고 양반으로서의 신분의식을 유지하였던 소위 양반가문이 있을 수 있었고,634) 신분제의 완전한 해체를 위해서는 1960년대 이후의 산업화를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635)
이러한 제반 상황은 곧 양반신분이 혁명적 계기에 의해 단기간에 해체·소멸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즉, 반상제는 갑오개혁에 의해 그 폐지가 선언되었지만 이후에도 관습상의 유제 상태로 존속하였던 것, 그리고 이 유제가 이후 전개된 근대 사회변동에 따른 여러 계기에 의해 점진적으로 해체·소멸되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양반신분은 주로 ‘관직보유’와 ‘家系의 위신’의 요인에 의해 다른 신분과 구별되어 형성된 신분이었다. 또한 양반신분은 ‘신분직업’과 ‘身分財’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며 독특한 생활양식(신분문화)과 신분의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반신분의 완전한 해체·소멸은 이러한 제반 구성요소의 해체·소멸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위에서 살핀 바 1894∼1910년 동안 진행된 일련의 변화는 주로 관직보유의 측면과 부차적으로 신분직업의 측면에서 양반신분에 일정한 타격을 가하거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도에 머물렀고, 아직 양반신분의 완전한 해체에 필요한 조건을 형성하는 단계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양반신분 존립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였던 지주제는 1950년의 농지개혁에 의해 비로소 청산될 수 있었다. 또한 관습상의 유제 존속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여타의 요소들은 해방 이후 진행된 근대민족국가의 수립과 도시화·산업화 및 외래 문화의 수용과 확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청산되거나 현저히 약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구질서가 해체되고 가족 및 친족이 지녔던 사회적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유교사회의 바탕을 이룬 유교적 이념과 생활양식이 자유·평등을 원리로 하는 새로운 이념 및 문화에 의해 크게 약화되거나 대체되었으며, 신분 및 토지소유에 바탕을 둔 폐쇄적인 계층·계급구조는 근대적 직업의 확산과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른 새로운 개방적인 계층·계급구조로 그 틀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분제 유제가 소멸된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러서도 ‘양반 가문’에 대한 향수어린 신분의식의 잔영은 최후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신분제를 겨냥한 사회혁명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던 1894∼1910년의 단기간내에 새로운 계층체계가 능히 신분제를 대체하여 양반신분을 해체·소멸시킬 수 있는 제반 조건을 형성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池承鍾>
624) | 愼鏞廈, 앞의 글, 7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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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 愼鏞廈, 위의 글, 76쪽. |
626) | 이러한 제측면에 주목하여 갑오개혁 당시 반상제 폐지가 실제로는 선언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종래 통설에서… 그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반부를 독립시켜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갑오경장 때 반상의 계급차별 내지 양반제도의 혁파가 선언되었다는 해석을 내린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개혁안의 중점은 그 구절의 후반부에 제시된 ‘不拘貴賤 選用人材事’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갑오경장 때 여러 가지 사회제도 개혁안이 발표되었지만 그 중에 양반제도 자체를 ‘혁파’하겠다고 꼬집어 주장한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종래 양반 귀족이 누리고 있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제특권을 폐지 혹은 박탈하겠다는 ‘혁명적’ 내용을 담은 후속 개혁안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柳永益, 앞의 글, 261쪽). |
627) | 愼鏞廈, 앞의 글, 79쪽. |
628) | 李相燦, 앞의 글, 88쪽. |
629) | 李相燦, 위의 글, 91쪽 등 참조. |
630) | 宋俊浩,<身分制를 통해서 본 朝鮮後期社會의 性格의 一面>(≪歷史學報≫133, 1992), 37쪽. “우리 사회의 신분제도는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사회 관습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발달된 것이요 따라서 그것은 政治나 法의 영역 밖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
631) | 柳永益, 앞의 글, 287∼288쪽. |
632) | 金泳謨, 앞의 책(1982), 138쪽. |
633) |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11일. |
634) | 宋俊浩, 앞의 글, 33∼34쪽 참조. |
635) | 정진상,<해방직후 사회신분제 유제의 해체>(≪社會科學硏究≫13-1, 慶尙大 社會科學硏究所, 1995), 34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