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민·천민층의 성장
개항이후 근대국가로의 발전과정에서 신분적 차별의 철폐는 필수과제 중의 하나였다.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 단계에서부터 신분제 폐지에 관한 논의는 계속 되어왔다. 하지만 한말 신분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변화의 계기는 역시 1894년의 갑오개혁676)이었다. 당시 개화파정권은 신분제의 전면 폐지를 결정했고, 그것은 특히 양반 특권의 폐지와 노비해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때문에 양반과 일반 상민사이를 구분하던 특권이 사라지고, 동시에 상민보다 하위에 놓여 있던 천민집단이 억압의 사슬에서 풀려남으로써 결과적으로 적어도 형식적이고 대체적인 수준에서는 전 인민의 평등화가 실현된 것이다. 상민들에게는 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지만 적어도 종래 양반에게만 허용되던 사실상의 각종 특권, 예를 들면 과거제·관직 등용 등이 사라지면서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비의 해방과 그 밖의 白丁 등 천민 집단의 해방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신분제 폐지의 효과가 하루아침에 사회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할 수는 없었다. 신분제를 통해 작용했던 경제적 불평등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오히려 자본주의적 경향이 개항이후 점차 활발히 전개되면서 불평등은 오히려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노비였던 자들은 전호 또는 임노동자로 바뀌어 갔으며, 때로는 영세소상인, 또는 수공업자가 되었다. 한편 백정·기생·승려 등의 천민집단들은 제약을 완벽하게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676) | 조성윤,<甲午改革期 開化派政權의 身分制 폐지정책>(≪金容燮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韓國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 知識産業社,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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