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팽배하였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톈진 조약을 빙자하여 우리 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비록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