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5. 근⋅현대의 정치[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일제의 국권 침탈

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러⋅일 전쟁, 1904).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

일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1907).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910).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읽기자료

간도 협약

제1조 일⋅청 두 나라 정부는 토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제3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토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표시한다.
제5조 토문강 이북의 한국인과 청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 정부가 청 국민의 재산과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
제6조 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吉長鐵道)를 연길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순종실록, 1909. 9. 4.〉

고종과 을사조약

을사조약은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무력적인 강압 속에서 이에 동조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이 찬성하여 체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조약의 과정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고종이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은 성립될 수 없다.

간도 귀속 문제

간도 협약에 따라 일제는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으나, 최근 토문강과 두만강이 별개의 강이라는 각종 자료가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간도의 귀속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조선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부분(18세기, 서울 대학교 규장각 소장)
백두산 정계비 부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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