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5. 근⋅현대의 정치[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3⋅1 운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강점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1919. 3. 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또,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도움글

일제의 3⋅1 운동 탄압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당한 사람은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3⋅1 운동 참가 인원 및 피해 상황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