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고려 시대의 생활

2.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학습 개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기본 이념하에 나라를 이끌었으므로, 일찍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태조 때부터 거란과는 마찰이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거란과의 충돌에서도 국토의 개척을 게을리하지 않아, 압록강 하류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송과는 바다를 통한 문물 교섭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그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 발전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와 여진족이 강성해져 압력을 가해 오자, 한때 형식적인 사대 정책을 취했으나, 끝까지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자주적인 고려의 대외 정책은 민족 문화의 개발과 독자성의 보존을 가능하게 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 시대에 북진 정책이 추진된 이유는 무엇일까?

2.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어떻게 물리쳤을까?

3. 송과의 밀접한 관계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4.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거란에 대한 정책

왕건은 나라를 세운 후, 거란과 강경하게 맞서면서 옛 고구려 땅의 회복을 위해 북진 정책을 썼다. 특히,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한 나라이고 문화적으로 야만의 나라라고 생각하여, 후손에게도 거란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는 거란과 전혀 교섭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고려의 이와 같은 정책은 자연히 그들과의 충돌을 가져왔다.

강동 6주

태조의 북진 정책과 강경한 거란 배척 정책을 계승한 정종은, 광군을 조직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거란은, 고려가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송과 손을 잡고 거란을 배척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 거란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 때, 고려의 많은 신하들은 땅의 일부를 내주고 화평할 것을 주장했으나, 서희는 적진에 들어가 담판으로 거란을 설득시켜 물리쳤다. 이 때,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얻어서 영토를 북쪽으로 넓힐 수 있었다.

현종 때에 거란의 제2차 침입을 받았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는 정변을 일으켰는데, 거란의 성종은 이를 트집잡아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해 왔다.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시켰으나, 돌아가는 길에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퇴로를 막아 대파시켰다.

그 후,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3차로 침입해 왔으나, 강감찬이 거느린 고려군은 거란군을 귀주에서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1019).

당시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초부터 북진 정책을 내세워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문물 제도를 안정시켜 나라의 힘을 길렀기 때문이었다.

천리 장성

세 차례의 거란 침입이 있은 후, 두 나라는 평화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방비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선,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도록 왕 가도에 명하여 20년 만에 완성하였다.

이어서 덕종은,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이 국방 시설을 튼튼히 하는 한편, 우리 문화와 전통의 우수성을 내세워 실록을 편찬하였고, 대장경을 만들어 국민의 호국 정신을 길렀다.

강동 6주와 천리 장성   
천리 장성   
거란, 여진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고려 덕종 때 유소에게 명하여 압록강 입구에서 원산만의 도련포까지 쌓은 장성이다.

무역과 벽란도

고려는 송과의 문화 교류에 힘썼다. 고려는 금, 은, 구리, 화문석, 유기, 종이, 먹, 삼 등을 수출하고, 책, 비단, 자기, 약재, 악기, 향료 등을 수입하였다. 송의 문화는 고려의 청자와 목판 인쇄술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려가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은 광종 때부터이지만, 거란의 압력이 미치자 일시 중단하기도 하였다. 송은 그 뒤 금의 압력을 받게 되자, 고려에 군사 동맹을 제의한 때도 있었으나, 고려는 군사적인 관계보다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주력하였다.

송과의 무역을 통하여, 송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송과 무역을 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벽란도에 출입하게 되어, 수은, 향료, 약품 등이 전해졌다. 그리고, 이들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Corea)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여⋅송 무역로   

동북 9성

만주의 넓은 지역과 고려의 동북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쳐 왔었다. 그러나, 12세기 초에 이르러 여진족은 완옌부의 추장을 중심으로 크게 뭉쳐, 함흥 근처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렇게 되자, 고려에서는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하고, 윤관 등에 명하여 여진을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은 동북 지방의 여진을 소탕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 주위에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족이 9성을 돌려 주기를 거듭 청해 오자,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돌려 주고 말았다.

윤관의 여진 정벌(민족 기록화)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을 쌓고 영토를 넓혔다.

그 후, 여진족의 추장 아구타는 거란군을 크게 무찌르고 나라를 세워 금이라 하였다. 금은 송을 압박하면서 중국의 북반부를 차지하였다.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된 금은 고려를 섬겨 오던 이 때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고려에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끝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정책은 나라의 어려움을 미리 막고자 한 일시적인 방편이었고, 국민은 이를 극복하여 자주성과 민족 수호의 확고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학습 정리

1. 고려는 태조 이래 북진 정책을 고수하였으므로, 거란 등의 북방 민족과는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2. 성종 이래 거란은 세 차례에 걸쳐 침입을 해 왔으나, 고려는 그 때마다 이를 격퇴하였으며, 전후 대책으로 나성과 천리 장성을 쌓았다.

3. 송과는 바다를 통해서 주로 경제⋅문화상의 교류를 하였다.

4. 금과는 한때 사대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그것은 나라의 어려움을 미리 막고자 한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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