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Ⅶ. 개화와 자주 운동2. 개항과 개화 운동[3]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통해 이루려 하였던 것은?

갑신정변의 결과

개화당 정권이 3일 만에 무너지자, 고종은 새 내각을 통해 각종 개혁 조치를 무효화하고, 예조 참판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정변 개입에 항의하고 김옥균 등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도리어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다. 이에 정부는 한성 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에 비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담판하여 텐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은 여전히 심하였다. 청⋅일 두 나라는 서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경쟁하였고, 10년 후에는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강(일부)

⋅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 토지의 수익에 대하여 매기던 조세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큰 자는 치죄한다.
⋅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치상의 명령이나 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김옥균의 글씨
우정총국 | 서울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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