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1. 미완성에 그친 과학 기술의 재건

6·25 전쟁과 과학 기술의 황폐화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 전쟁은 산업은 물론 교육과 과학 기술에도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전쟁으로 인해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의 이학부는 건물과 설비가 완전히 불타 버렸고 공과 대학도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서울 대학교는 다른 대학과 공동으로 부산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시 연합 대학(戰時聯合大學)을 설치·운영하였다. 그러나 건물·설비·교수·재원 등 모든 것이 부족하여 학교 교육이 충실히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였다. 군대에서 학교를 비롯한 주요 건물을 모두 차지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형편없이 부실하고 비좁은 교실에 대거 수용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교수 인력은 워낙 적은데다가 낮은 보수 때문에 다른 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수들 중에는 군사 관련 기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달했다.

<1952년 서울 대학교 졸업식>   
6·25 전쟁 중에 천막 교사에서 졸업식을 거행하는 광경이다.

중앙 공업 연구소와 지질 광산 연구소를 비롯한 연구 기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건물이 파손되고 설비가 손실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까지 유실되고 말았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예산과 인원 역시 계속 감축되어 연구 활동 자체가 힘들어졌다. 차츰 자리를 잡아 가던 학회 활동도 전쟁을 맞아 많은 피해를 입고 오랜 침체 상태에 빠져들었다. 예를 들어, 대한 화학회는 연구 발표회를 개최하고 그 내용을 학회지에 실어 활기를 띠는 듯했으나, 학회지가 발간되자마자 전쟁의 포연(砲煙) 속에 소실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과학 기술자들을 군사 관련 기관에 종사하도록 조치하였다. 국방부 소속의 과학 기술 연구소가 확대되어 많은 과학 기술자를 연구원으로 채용하였다. 그 목적은 과학 기술자를 동원하여 전시 과학 연구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과학 기술자의 월북이나 납북을 방지해 인적 자원을 보존하는 데 있었다. 또한 과학 기술자들 중에는 군사 연구와 직접 관련된 조병창(造兵廠) 등에서 근무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일부는 현역으로 군에 입대해 기술 장교나 교관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의 과학 기술자들은 연구는 물론 생계조차도 꾸리기 힘들었으므로, 전시의 군사 관련 기관은 과학 기술자들이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국방부 과학 기술 연구소와 조병창 실험실은 1954년에 국방부 과학 연구소로 통합되었다.

6·25 전쟁은 일반인에게도 과학 기술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게 한 사건이었다. 과학 기술의 수준이 전쟁의 승패, 나아가서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탱크와 비행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한 것이나, 미군의 융단 폭격을 바탕으로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은 현대전에서 과학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였다. 휴전 직후에 이승만 정부가 현실성이 결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탄 개발을 공언했다는 것은, 국방을 위해서 과학 기술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대학 진학에도 반영되었다. 그동안 지나칠 만큼 법학과 문학 계통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이 전쟁을 거치면서는 과학 기술 분야로 진학하는 사람들이 매우 크게 늘어났다. 여기에는 이공계·농수산계·의약계 대학생들이 다른 전공자들에 비해 재학 중에 징집 연기 혜택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서울 대학교의 경우에는 이공계 졸업생의 수가 1947년에 29명에 불과했던 것이 1953년의 182명을 거쳐 1957년에는 590명으로 증가하였다. 전국적으로 이공계 대학생 수는 1953년에 1만 7381명, 1954년에 1만 9340명 을 기록하였다.

6·25 전쟁 동안에는 각 기관별로 북한 점령군 치하에 있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적 전반에 대한 심사가 시행되기도 했다. 그 결과 상당수의 과학 기술자와 학생이 파면되거나 제적되었고, 이에 관한 내용이 이력서와 신원 진술서에 기재되어 많은 불이익을 받았다. 물론 몇 차례의 사면(赦免)을 거치면서 대부분은 징계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은 과학 기술자들이 정치와 이념의 문제를 외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6·25 전쟁과 함께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계는 남과 북으로 완전히 나누어졌다. 6·25 전쟁 전에는 월북하거나 월남하는 과학 기술자가 제법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지리적 이동은 고사하고 서로 간의 대화와 교류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 직후에는 남북한 과학 기술자의 이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은 정치 체제를 갖추는 일에 여념이 없었고 대부분의 과학 기술자들은 자신의 분야를 재건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이 격렬해지고 남과 북에 상이한 정치 체제가 정착되면서 월북하거나 월남하는 과학 기술자가 많아졌다. 특히 김일성 종합대학의 설립과 국대안 파동이 서로 맞물리면서 1947년과 1948년에는 남한 과학 기술자들의 월북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북한에 거주하고 있었던 몇몇 과학 기술자들도 정치적·종교적 탄압을 피해 남한으로 건너왔다. 이어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한 번 과학 기술자들의 체제 이동이 있었다.

월북한 과학 기술자는 대학 출신만 모두 8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당시에 대학을 졸업하고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과학 기술 인력이 2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므로 월북자의 비율은 무려 40%에 달한다. 그들은 초기의 김일성 종합대학·흥남 공업 대학·김책 공업 대학 등과 과학원을 구성하고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주요 인물로는 리승기·도상록·김양하·려경구·김지정·한인석· 오동욱 등을 들 수 있는데, 일본 유학 출신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반면에 월남한 과학 기술자는 10여 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중 일부는 미국 유학 출신자들로 미군정을 통해 행정부로 들어가 과학 기술 정책을 수립·추진하는 일을 하였다.

이처럼 월북 과학 기술자가 많았던 것은 북한이 과학 기술의 진흥을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면서 대대적인 공작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북한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과학 기술을 중시했지만 인력 부족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북한은 남한에 있던 과학 기술자를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유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북한은 남한 과학 기술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대학 교수·기사장·소련 유학 등과 같은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였다. 이에 반해 북한의 과학 기술자 집단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데다가, 그 중의 일부가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남한을 선호했기 때문에 월남한 과학 기술자의 수가 많지 않았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과학 기술자들은 상호 교류가 완전히 끊긴 채 상이한 국가 체제 아래에서 활동하였다. 가뜩이나 부족했던 과학 기술 인력이 거의 절반으로 양분된 것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자들이 정치적·이념적 대립을 통해 입게 된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든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1950년대 이후에 남한과 북한의 과학 기술자들은 사고방식과 행동 유형에서도 상반된 양상을 보였다. 남한에서는 과학 기술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외면하는 결과가 빚어졌던 반면에 북한에서는 과학 기술이 더욱 정치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필자] 김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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