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3. 북한 과학 기술의 어제와 오늘

과학 기술자 모셔오기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과학 기술을 익힌 사람이 당시 너무나도 모자랐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이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교묘한 제도적 장벽을 만들었다. 특히 과학 기술 교육은 하급 기술자를 양성하는 실업 교육에 머물렀다. 경성 제국 대학의 이공 학부가 1941년 뒤늦게 생겼으나 광복 전까지 한 명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해외 유학 또한 쉽지 않은 일이어서 본인의 능력은 물론 주변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했다. 어렵사리 유학길에 오른다 해도 객지 생활의 고달픔은 물론 각종 제도적·비제도적 차별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결과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뒤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미국에서 이공계(의학·농학 제외) 정규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모두 합쳐 400명 남짓에 불과했다.

이공계 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인은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다섯 명씩, 모두 열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인재가 귀한 상황이었으므로 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은 한 사람의 과학 기술자라도 더 모셔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앞서 소개한 대로 북한 정부는 새로이 과학 기술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공계 고등 교육 기관을 대거 설립하였다. 아울러 이미 경력을 쌓은 유능한 과학 기술자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과학 기술 인력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의 행적을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등용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고등 교육을 받은 인텔리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식민 정부나 일본인과 관련된 직장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었다. 과학 기술자를 채용할 정도로 규모가 큰 직장은 대부분 식민 정부나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정부는 이들의 과거를 캐묻지 않고, 주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일제를 위해 일했다 해도 그들의 본심은 애국적이었다는 논리로 이들을 앞장서서 옹호해 주었다. 많은 과학 기술자가 이력서에 자신의 과거를 소상히 쓰고 새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선에서 과거 행적에 대한 추궁을 면제받았다.

<북한 과학 기술자의 이력서>   
흥남 공업 대학이 설립될 당시 과학 기술자가 썼던 자필 이력서의 일부이다.

나아가 북한 정부는 남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과학 기술자들도 북한 쪽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당시 남한은 과학 기술을 마음 편히 연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과학 기술자 영입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남한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별다른 중공업 설비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므로 과학 기술자들이 실력을 발휘할 자리가 그만큼 적었다. 더욱이 당시 남한을 다스리던 미군정은 성급한 정책으로 지식인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 잦았다.

이른바 ‘국대안 파동’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 지역의 여러 전문학교와 경성 제국 대학을 합쳐 국립 서울 대학교로 개편한다는 미군정의 안은 경성 대학 교수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날로 거세어지던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경성 대학은 수업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경성 대학의 교직원이 여럿 해직되거나 낙향함으로써 교단을 떠났다. 북한은 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북한행을 종용했다. 김일성의 친서를 지닌 밀사까지 파견해 가며 조직적인 영입 사업을 벌인 결과, 북한 정부는 많은 수의 과학 기술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한 출신 주요 과학 기술자의 절반 가까이가 북한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들은 이후 북한의 과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필자] 김근배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