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계경제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이 다양한 식료자원을 채집하여 먹고 살았다는 것은 설명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채집가능한 자원이었던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연환경, 특히 식생을 복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근래에 자료가 늘고 있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반도내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식물상을 복원할 만한 충분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지는 않다. 용곡동굴 등과 같은 일부 구석기유적에서 고화분이 채집되었지만215) 꽃가루가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호수나 습지 등이 많지 않아 화분분석의 자료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가능한 방법은 인위적으로 훼손이 덜 된 시기, 즉 농경으로 본격적인 훼손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식생을 파악하여 기후변동으로 인한 식생변화의 폭을 대입하여 복원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식생은 빙하시대 기후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주류를 이루는 혼합림이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후가 온난해질 경우에는 활엽수림이 북상하거나 또는 전체 숲에서 점유하는 비율이 커지게 되고 빙하시대가 되면 이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식생의 구성을 복원한다고 하더라도 유적이 형성된 미세환경의 복원에는 제약이 있다. 물론 풀화분의 증가나 나무화분의 증가 그리고 초원성동물의 존재 등, 동식물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식생형태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고인류가 서식한 환경의 식물지리적 분포를 복원하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 현재로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산지나 평지의 많은 부분이 숲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숲에는 관목이 많아서 동물의 이동이나 고인류의 서식활동에 지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우리 나라의 숲의 경우에는 한번 형성되면 그 지속성이 커서 화재나 인위적인 변형을 가하기 전에는 변화가 적은 편이다. 고인류들은 강을 따라 발달하고 있는 범람원이나 평지의 일부 개활지와 구릉지의 숲과의 생태이행대(ecotone), 즉 복합생태지역을 이용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복합생태지역을 이용하는 것은 당시의 인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주거지역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존재함으로써 고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부존자원이 가장 많은 곳이다.
구석기인류의 생계방식에 대한 연구는 주어진 고고학적 자료에서 추론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개발된 방법들이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채집경제집단에 대한 연구이다. 이러한 민족지적인 방법은 그 관찰된 현상들이 곧바로 과거 구석기시대에 일어났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특정한 환경 아래 보이는 행위의 다양한 양상의 범위에 대한 추론의 근거를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지역에 있어서 이러한 원시경제를 영위하는 집단은 별로 없으며 부분적으로 원시경제의 환경적응 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지만, 이러한 집단에 대하여 체계적인 인류학적 연구가 진행된 바가 극히 적은 편이어서 이 동아시아지역에 있어서 구석기인류의 적응에 대하여 설명할 때는 한계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지역은 사실 호모 에렉투스집단이 가장 이른 시기에 온대지방에 진출한 지역이지만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지역은 채집경제집단이 적응하는 데는 그다지 좋은 환경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계절이 뚜렷하며 각 계절별로 식량자원이 고르게 분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겨울과 초봄에 채집대상이 되는 식량은 극히 적어서 그다지 멀지 않은 역사시대에도 굶어 죽는 자가 있는 정도로 식량자원이 계절별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초에 조사된 한반도에서 나는 식물들 중에 식용하고 있었던 식물의 종류를 계절별로 구분하여 볼 때도 분명히 이러한 계절별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표 1>). 그렇다고 구석기시대에 장기적인 식량저장법이 개발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현재로서는 전혀 추측의 차원이지만 겨울이나 초봄에는 결국 동면하는 동물을 이용하거나 동물들을 사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온대지역에서도 전 구석기시대를 통하여 식물자원은 고인류의 주요한 식료원이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한반도나 동북아시아지역에 자생하는 식물의 열매나 과실의 경우에 그 크기가 작아서 열대나 사바나지역의 경우보다도 훨씬 많은 작업량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군집하는 식물자원의 경우에는 여행거리가 짧을 수도 있겠지만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여행거리가 소요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료자원 자체의 확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고 에너지의 투여가 크기 때문에 이 지역에 등장하는 석기문화는 기회적이며 즉시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된다.216) 이러한 채집경제와 석기문화의 유형은 전기에서 중기를 거치는 동안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지속되어 왔으며 상부 홍적세, 즉 빙하가 극성기로 들어서면서 이 지역의 식물자원의 생태가 크게 변화하고 개활지에 여러 종류의 우제류 짐승이 서식하게 되어 동물자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지기 시작하면서 달라지게 되었다고 본다.
동물들도 주요한 생계자원이었음에 틀림없지만 식물자원보다는 일상생활의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물은 식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양가가 높고 단백질의 섭취효율이 크지만 안정적으로 공급되지는 못한다. 당시에 동물성 단백질을 획득하는 방법은 사냥을 하거나 다른 동물이 먹다 남기거나 죽은 동물의 시체에서 구할 수 있었다. 사냥은 몰이사냥을 하거나 또는 함정이나 올가미를 이용한 사냥을 상정할 수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내기란 어렵다. 물론 전기 구석기시대에도 몰이사냥을 한 흔적들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스페인의 Torralba유적에서는 맘모스를 불로써 몰이하여 늪지에 빠뜨린 후에 사냥한 흔적이 있다. 이 시기의 사냥에 사용된 도구는 아마도 나무창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나무창의 존재는 아프리카나 영국에서 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유적에서 발견된 바 있는데217) 물론 이러한 나무창들이 진정 나무창인지 또는 땅파는 도구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무를 다듬어서 끝을 뾰족하게 사용한 증거들이 있는 이상 이와 유사한 것들이 사냥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는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지역의 대형석기들 중에서 많은 것들이 대형긁개로 사용되고 다른 종류의 대형석기들도 나무를 다루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각면원구나 다른 대형석기들이 사냥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일찍부터 예견되던 것이다. 후기 구석기유적인 수양개유적에서는 꼬다리가 있는 첨두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나무의 끝에 장착하여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며 이외에도 후기 구석기에는 장착이 가능한 소형의 첨기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사냥의 비중이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남아프리카의 중기나 후기 구석기시대에 사냥한 경우를 보면 사냥은 대단히 기회적인데 사냥의 대상이 무리에서 낙오된 늙거나 병든 동물 그리고 어린 짐승들이 주요한 사냥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218) 그리고 많은 원시경제에서 보면 소형동물-쥐나 다람쥐 같은-이 주요한 대상이 되며, 개구리나 곤충류가 주요한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의 구석기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신체적으로 훨씬 발달하고 이빨과 발톱 그리고 뿔같은 무기를 가진 동물을 사냥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따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물성 단백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동물사체를 수습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은 호모 헤빌리스의 단계에서부터 해오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구석기 전기간을 통하여 동물성 단백을 섭취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내에서도 석회암동굴의 여러 지점에서 동물뼈들이 발견되고 이러한 동물뼈는 고인류가 식량으로 하기 위하여 반입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219) 또한 동굴내에서 발견된 동물뼈들 가운데 어떤 것은 도구로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발견된 동물화석이 구석기시대의 환경복원이나 생계경제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동굴 속의 동물뼈들이 어떻게 고인류의 생계와 관계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동물화석이 고인류의 생계경제에 어떠한 정보를 제공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이 동물화석들이 고인류의 음식이나 도구의 재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진행시켜서는 안된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모든 동물뼈가 사람에 의해서 이동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없으며 지질학적 및 생물학적 변형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퇴적과정을 복원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인간의 행위를 해석하는 데에 많은 문제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석회암동굴 속에 동물뼈가 퇴적되는 경우는 인위적인 반입 이외에도 다른 동물, 특히 하이에나나 개과의 짐승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다른 식육류 짐승들도 먹이를 거처에 반입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동물들이 사람과는 시점을 달리하여 그 동굴을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이에나나 개과의 짐승 그리고 설치류의 짐승들은 뼈를 변형시키는 경우가 다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을 인공적 형상과 구별하는 것이 구석기고고학자들의 주요한 분야 중의 하나이다. 화천동동굴에 들어 있는 동물뼈들의 경우에는 분명히 동물들이 지상에서 석회암 틈새로 빠져 들어가서 죽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검은모루 등의 경우에도 동물뼈가 인공적으로 반입되어 쓰였다기보다는 동굴에 퇴적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지표에 존재하던 동물뼈들이 같이 반입된 경우도 많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이 동물들은 인간들이 음식으로 반입하였다고 가정하고 분석한다면 큰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있다. 설령 인간에 의해 반입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세심한 뼈의 분석을 통하여 반입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구체적인 생계방식은 밝혀내기 어렵다. 예를 들어 두루봉동굴 제9굴의 경우, 동물의 최소 개체수를 곧바로 동굴 속에 반입된 동물의 마리수로 환산하여 인간이 사용한 칼로리를 계산하였는데,220) 이에는 많은 무리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최소 개체수(MNI:Minimum Number of Individual)라고 하는 것은 해당 유적에 관련된 동물의 총수이어서 만일 사람이 죽은 사체의 다리만을 뜯어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이는 하나의 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기의 총량의 이해에 문제가 있고 동물의 사체가 모두 인간에 의해 반입된 것이라는 주장 역시 많은 설명을 요하는 부분이다. 현재 중국의 주구점에서 출토되는 많은 동물뼈 중에서도 인간에 의하지 않고 하이에나 등의 동물에 의해 반입되었다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221) 동굴내의 동물뼈들에 대한 화석형성과정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는 고인류의 생계경제를 복원한다는 자체가 아무런 고고학적 의미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동물뼈를 가지고 생계경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복원 이전에 반드시 화석이 형성된 과정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15) | 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고된다. 김홍걸,<덕천 승리산 동굴유적의 포자-화분구성 승리산사람의 화석층>(≪조선고고연구≫ 1993-1). 로영대,<함북 화대군 털코끼리 발굴지에 발달한 니탄층의 포자화분조합>(≪문화유산≫ 4, 1962), 49∼54쪽. 전제헌·윤진·김근식·류정길,≪용곡동굴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6). 이융조,<청원 두루봉 새굴·처녀굴의 자연환경연구-식물상의 자료를 중심으로->(≪孫寶基博士停年退任紀念 考古人類學論叢≫, 1988), 29∼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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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 裵基同,<全谷里 구석기문화와 동북아시아 홍적세 고인류생존활동>(≪學術院論文集≫-人文科學篇 28, 1989), 1∼31쪽. |
217) | Oakley, K. P., Man the Toolmaker 6th. ed., University Chicago Press, 1972. |
218) | Binford, L. R., Faunal Remains from KRM, Academic Press, 1984. |
219) | 손보기,≪청원 두루봉 9굴발굴보고-두루봉 9굴 살림터≫(연세대 선사문화연구실, 1983). |
220) | 손보기, 위의 책. |
221) | Binford L. R. & Chuan Kun Ho, Taphonomy at a distance : Zhoukoudian, “The Cave Home of Beijing Man?”, Current Anthropology 26-4, 1985, pp. 413∼4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