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Ⅲ. 19세기의 민중운동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4) 농민항쟁의 평가

 1862년 농민항쟁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시기의 여러 가지 사회모순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농민항쟁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특정한 몇 개 지역을 제외하고는 군현 안의 싸움에 한정되는 양상이 드러난다. 다른 지역의 농민항쟁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함께 연합하거나 지역을 벗어나 계속하지 못하였다. 또한 봉기의 내용이 봉건적 토지제도나 신분제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 이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계급적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정치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전환되지 못한 점이 나타난다. 아울러 외형상 조세의 양을 낮추거나, 지대를 고정하려는 조건을 내건 경제투쟁에 머물렀고, 그것도 국가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등 중앙권력에 호소하는 형태를 보였다.

 또한 당시 농민봉기가 군현 단위의 투쟁에 머물렀던 점은 국가의 농민지배방식에도 기인한 것이었다. 국가가 파악하는 최하의 행정 단위나 조세수취 단위는 군현이었고 특히 부세의 경우 군현별로 조세 총량을 결정하여 납부하도록 하였다. 부세량은 각 군현의 전결, 호구수에 따라 달랐고 징수 방법도 군현 내 고유의 관행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항쟁의 내용 가운데 부세의 양이나 징수 방법, 운영과정 등의 문제를 시정하고자 할 때 해결 방법이나 양상은 군현 단위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62년 농민항쟁에서는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군현 단위의 국지적 규모에서 벗어나서 이웃 군현까지 활동을 확대시키면서 다른 읍의 항쟁을 도와주거나 연대하려고 한 점이 보인다. 가령 함양농민의 활동이 한 사례인데, 3월 16일 경상도 함양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면서 이웃 군현에까지 확산되었다. 함양 농민들은 전라도 長水로 通文을 띄워 만일 원통한 일이 있으면 앞으로 그곳으로 옮겨가겠다고 하였다. 나아가 이들이 이웃 여러 읍으로 통문을 보내며 선전활동을 하자 다른 지역민들의 호응도 일어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국지성을 넘어섰다. 때로는 이웃 지역의 활동까지도 강제할 정도였다. 함양에서는 남원민에게 이서 가운데 흉악한 자 7명을 타살한 다음 소식을 보내도록 요구하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직접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처벌하겠다고까지 강압적으로 활동하였다.685)

 이러한 활동은 함양을 중심으로 하여 10여 읍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무리들을 “晋州餘黨이 각처에 흩어져서 서로 상응하는 듯하다”고 하여 읍간의 활동을 연계적으로 보았다. 심지어 정읍에서 수령을 위해한 사례까지도 진주여당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사료가 부족하여 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농민들의 문제가 읍 단위를 넘어서는 농민 공통의 문제임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진주의 경우에도 인근 곤양, 단성의 농민들도 봉기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전라도 여산의 민가가 충청도 은진의 농민 수천 명에 의해 불타자 정부에서는 커다란 문제로 지적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선산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 뒤 곧바로 이웃한 개령에서, 부안의 농민항쟁 뒤 곧이어 인접 금구에서, 충청도 회덕의 농민항쟁 뒤 회인과 문의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봉기가 동시에 발생함으로써 결코 군현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성주·선산·상주지역의 경우 화전세 감하, 결가 인하 등 요구조건의 관철을 위해 2차, 3차의 봉기가 거듭 발생되어 정부의 개별적인 대응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는 항쟁의 규모가 컸고 적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함양농민항쟁의 경우 다수의 주민들이 운봉으로까지 피난가기도 할 정도였다.686)

 결국 이같은 사실들은 농민봉기가 질적으로 고양되고 농민들이 계급적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분산적이고 국부적인 지역성을 극복하게 될 때 차츰 전국적인 반봉건항쟁으로 유도될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농민들은 동헌과 읍내 습격을 통해 조세투쟁과 토호, 사대부들의 불법적인 향촌 지배에 대한 응징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의 하나는 중앙에서 파견된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에게 직접 정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호남선무사 조구하는 이에 대해 “각처 민읍의 수 백, 수 천의 농민들이 3리 5리 간격으로 모여 있다가 신의 행차만 나타나면 모여들어 정소하였고 이로 인해 낮 동안 불과 3, 40리 밖에 갈 수가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농민들은 인접 마을의 해결 수준에 견주어 자신들의 문제도 적극 타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농민들은 실현을 보장할 完文이나 節目을 계속 요구하였고, 고산현의 경우 암행어사 조병식으로부터 各面捄弊節目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사실 농민들이 제기한 폐막은 평소 동헌이나 감영에서 해결을 거부했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함평봉기의 주도자 정한순은 안핵사 이정현 앞에 스스로 나타나서 10조에 달하는 요구사항을 올리면서 “현감, 감사에 대한 등소가 허사였는데 이렇게 사또에게 바치게 되어 다행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농민들은 국왕의 명을 받고 파견된 관리들을 지방수령과는 별도의 존재로 여겼고, 그들의 공적 권위에 힘입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농민들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극히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권한조차 갖지 못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행동은 당시 농민들과 지도자들의 낮은 정치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한 측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봉기과정 중 읍권을 장악한 사실도 있음은 농민들의 정치적인 지향을 단편적으로나마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전면봉기를 하면서 수령이 도피하고 관속이 흩어지며 봉건권력으로 농민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 때 농민들의 향회가 바로 읍권을 장악하는 기구로 등장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농민들의 의사에 합당한 인물로 首吏, 首鄕과 같은 핵심 관속을 임면하고 문제가 된 文簿를 열람, 조사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농민들의 읍권 장악 기간이 수 개월에 이르기도 하였다. 추측컨대 이 기간을 통해 농민들의 정치의식은 강화되었고, 활용여부에 따라 분명한 투쟁목표와 구체적인 타도대상이 설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농민들은 1862년 농민항쟁 과정에서 조세제도의 철폐, 시정 요구를 통해 경제적 면에서의 반봉건을 주장하였고 수령, 관속과 읍권 담당자들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현존하는 봉건적 통치체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인 정치의식을 표출하고 있었다. 반면 정부에서는 당시의 사회모순을 균등한 조세부과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농민항쟁으로 일어난 체제붕괴의 위기 상황을 삼정이정책의 시행을 통해 모면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농민항쟁은 단순히 수탈에 대한 저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잘못된 수취관행에 대한 개혁의 요구였다. 따라서 항쟁이 발발하면서 관에 구체적으로 요구조건을 하나하나 제시하기도 하였고, 지역에 따라서 읍내에 오랫동안 둔취하면서 읍폐 처리의 추이를 지켜보기도 하였다. 나아가 중앙에서 釐整廳을 설치하고 관료, 유생층의 의견을 묻자, 농민들도 자신들의 견해를 정리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첫째 吏逋를 부당하게 민간에 부담시키는 행위를 거부하였으므로 항쟁의 결과 도결, 결렴 등이 상당히 혁파되었다. 실상 농민들은 도결의 結價 책정의 형태를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도결을 통한 포흠 전가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는 환곡의 耗條를 ‘臥還取耗’라는 부세화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가령 상주에서 포흠의 모조를 수취하는 문제를 모조를 토지에 부과할 것인가 호구에 분배할 것인가를 두고 大民과 小民 간에 주장이 맞섰는데, 이는 포흠의 충완과는 달리 와환취모의 형태로 부세화할 때 그 대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결가 인하를 요구하는 경우 단순히 부세액을 낮춰달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수취의 금납화 및 정액화를 농민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즉 관에서는 결가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그간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던 雜稅 및 포흠분의 結斂을 결가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결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결가 인하는 이같은 명목없는 수취를 거부하면서 개혁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지역에서 농민항쟁을 치루면서 결가 인하를 얻어내었다. 가령 선산은 8냥, 성주, 상주 10냥 정도였다.

 상주의 경우 농민의 요구조건과 부세제도 전반의 변화양상을 잘 제시하고 있다. 본래 선무사 이삼현이 내려왔을 때 결가 10냥과 洞布를 시행하겠다고 하였으나, 농민들은 民會를 통하여 결가는 8냥, 환곡은 와환취모를 하였으며, 軍布는 2냥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687) 상주에서는 농민항쟁의 성과로서 농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結役 외에 수탈의 소지가 컸던 환곡모조, 大同木, 統營米 등을 포함하여 13냥으로 책정되었다. 상주는 처음부터 농민층이 항쟁의 전과정을 주도하였고 따라서 민회의 활동이 활발하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항쟁의 성과도 뚜렷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농민항쟁에서 표출된 농민들의 邑弊矯捄의 주장은 삼정제도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부세체제를 요구하는 반봉건운동의 과정이었다.

 이렇게 부세문제를 중심으로 표출되었으나 이를 통해 계급간의 갈등도 더욱 심화되었다. 항쟁이 끝난 뒤 이서층과 대민들은 항쟁에 가담한 농민들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688) 이전의 항조투쟁도 항쟁 뒤 더욱 격화되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수탈의 잠정적인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 삼정이정책은 농민들의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 성과물이기도 하였다. 농민항쟁이 일어난 뒤 성립된 대원군정권은 대내적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戶布法, 社倉制와 같은 일련의 조세개혁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대원군의 조세개혁책은 앞서의 1862년 농민항쟁에서 농민들이 제기하고 투쟁으로 획득하고자 하였던 삼정이정책의 일부를 계승한 데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1862년 당시의 삼정이정책이야말로 당면한 사회모순을 부분적이나마 해결하는 데 있어서 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응책이었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한편 대원군, 민씨정권기에도 근본적인 토지개혁에 대한 시도는 없었으며 토지균분의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토지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는 농민들이 지배층에 대한 투쟁을 통해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농민들은 1862년 농민항쟁 이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농민항쟁을 통하여 이같은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

 19세기 후반 농민들의 항쟁은 이처럼 다양한 계급모순 외에 새로이 민족모순이 부가되면서 고양된 농민들의 의식과 외부 조직체계의 도움에 의해 전국적인 항쟁으로 그 외연이 넓어졌다. 체제모순의 담지자인 농민들은 차츰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저항의 주체로 결집되어 갔는데 이같은 계기는 바로 1862년 농민항쟁으로부터 마련되었던 것이다.

<宋讚燮>

685)≪龍湖閑錄≫권 3, 三南民鬧錄, 51∼52쪽.
686)위와 같음.
687)≪壬戌錄≫<鍾山集抄>, 206쪽.
688)≪晉陽樵變錄≫巡營甘結.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