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궁궐 안의 일상 옷차림
서울 도심부에서 우아한 자태와 기품을 뽐내며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궁궐의 긴 역사 속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있을까?
왕과 그의 가족 및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살았던 조선시대 궁궐은 본래 왕족이 사는 큰 규모의 건물을 일컫는 의미의 궁(宮)과 궁의 출입문 좌우의 망루를 일컫는 궐(闕)의 합성어로,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 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 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가의 중심지이자 행정 부서이면서 왕의 생활 공간인 궁궐에는 왕과 그의 가족, 그들의 생활을 돕는 여인 집단인 궁녀, 그리고 내시들이 상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왕의 가족은 왕의 배우자(정비인 왕비 이외에 내명부 소속 다수의 후궁)와 직계 존·비속으로 왕비와 대비, 대왕대비 등 현재와 과거의 왕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왕의 자손 및 그 배우자도 있는데 배우자는 장래 왕통을 이을 장자와 장손의 배우자에 국한된다. 세손을 제외한 왕의 자녀(대군, 군, 공주, 옹주)와 세자의 자녀(대군, 군, 군주, 현주)는 성인례(成人禮)인 관례와 계례를 치르기 전까지만 함께 생활한다. 성인례는 열서너 살
때 치르지만 남자는 왕과 세자, 세손을 제외하고는 열 살이 넘으면 궁궐에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로 여덟 살 무렵부터 저택을 마련해서 보모 상궁과 궁녀를 딸려 독립시킨다. 이 밖에도 궁궐에서 상주하지는 않지만 아침저녁으로 궁궐에 출입하는 문무백관들이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궁중 생활은 왕권 국가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을 중심으로 엄격한 규범 아래 행해졌다. 따라서 이들의 옷차림은 궁중 생활의 법도에 따라 세련되고 화려하면서도 엄격한 규범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궁궐을 출입하며 업무를 보았던 사람들의 옷차림도 각각의 지위와 역할 및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기에 궁중 생활을 흥미롭고 진솔하게 보여 준다.
관직이 없는 일반인은 평생에 한 번 구경하기 힘들뿐더러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궁궐. 그곳의 특별한 사람들은 어떠한 옷차림으로 어떤 생활을 했을까?
공적 장소로 많은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궁궐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궁궐 안 사람들은 평상시에도 언제나 예의를 갖춘 모습이어야 했다. 따라서 평상시 업무에도 일상적으로 관복을 입었고 특별한 행사에는 그에 맞는 예복용 관복을 따로 입었다. 평상시 집무할 때, 특별한 의식에 참여할 때 등 의식의 종류와 중요도에 따라 입는 옷을 관복(官服)이라 하는데, 관복에는 보통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 상복(常服)이 있다. 이 중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관복은 상복이며, 조복은 최고의 예복으로 국가의 경사나 축하 의식 때, 공복은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 또는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제복은 제례를 지낼 때 입었다. 이렇게 의식의 종류와 용도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하는 체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조선시대 초부터 본격화되었다.
조선 태조는 국가를 세운 후 바로 국가 체제 정비 작업과 더불어 관직 체계 정비에 힘썼다. 또한, 관리의 서열과 위상의 구별을 위해 관리들이 입
는 공식적인 의복인 관복의 체계 정비에도 관심을 가지고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때의 제도는 고려 말 우왕이 명나라 것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며, 본격적인 체제는 세종 때에 마련되어 조선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제도와 풍속이 조금씩 변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는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의복도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 관복만은 거의 변하지 않고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