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차 생활

고대의 차 문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는 매우 어렵다. 차에 관한 유적도 적고, 남아 있는 기록조차도 매우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교 관련 기록이나 고려시대의 문집 속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고대인들의 차 문화를 어느 정도까지는 그려볼 수 있다.
신라인들은 차를 의례용으로 사용하고 마신 듯하다. 기호품으로 마시는 사람도 있었지만, 당시의 차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귀한 물품이었기에 왕실, 귀족, 일부 승려들만 마실 수 있었다. 8세기 즈음 차 수요가 계속 늘어나자 국가에서는 토산차(土産茶) 재배의 필요성을 느꼈다. 8세기 중엽 연기 조사가 차 종자를 화엄사에 심었다는 기록도 있고, 9세기 초 중국에 다녀온 대렴(大廉)이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도 있다. 차나무는 토양과 기후가 알맞아야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차 종자를 심었다고 하여 곧 토산차가 보급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사 토산차가 재배되어도 이 역시 일부 상류층에서 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산차의 재배는 그 앞 시기까지 중국차에 의지했던 차 공급이 점차 토산차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차를 위한 다구(茶具)를 갖추고 있었
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났을 때 충담사는 앵통243)(櫻筒, 벚나무 속을 파내고 만든 통)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다구가 있었다. 또, 왕이 차를 부탁하자 충담사가 바로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실외나 실내 어디서나 차를 끓일 수 있게 다구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는 아궁이에 굴뚝이 달린 흙으로 빚은 풍로(風爐)가 출토되었다. 솥에 물을 부어 풍로 위에 올린 뒤 아궁이에 불을 일구어 찻물을 끓였을 것이다. 혜소는 돌로 된 부(釜, 발 없는 큰 솥)에 차를 넣고 끓였다고 하였다. 찻물을 끓이기 위해 돌 또는 쇠로 된 솥이나 가마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차를 끓일 때 쓰는 물을 모아 두는 돌못과 찻물을 끓일 때 쓰는 돌화덕에 대한 기록도 있다. 강릉 한송정(寒松亭)은 사선(四仙)으로 불리는 신라 화랑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이 전국 명산대천을 순례하다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차를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곳이다. 이인로(李仁老)·김극기(金克己)·이제현(李齊賢) 같은 고려 문인들은 한송정의 차 유적에 관한 기록을 문집에 남겼으며, 특히 이제현은 한송정의 돌못과 돌화덕을 보지 못한 후세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형태와 용도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244) 이에 따르면 그곳에는 두 개의 돌덩이가 있는데, 하나는 사방을 네모나게 다듬고 그 속을 둥글게 파서 안에 물을 담아 둔다고 하였다. 그 아래에는 구(口) 자 모양으로 구멍이 있는데, 열어서 흐린 물을 보내고 막아서 맑은 물을 담는다고 하였다(돌못). 다른 하나는 깊게 패인 곳이 두 개 있는데, 둥글게 파인 곳은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으로 파인 곳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구멍을 조금 더 크게 내어 둥글게 파인 곳과 통하게 하는데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돌화덕). 신라인들은 돌못에 깨끗한 물을 담아 두었다가 솥에 덜어 나무나 숯으로 불을 놓은 돌화덕 위에 올려놓고 차를 끓여 마셨던 것이다.
신라 유물 중에는 다양한 형태의 잔들이 있는데, 그 중 어느 것이 찻잔인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다행히 경주 안압지에서 찻그릇이 발견되어 신라시대 잔의 형태를 추측할 수 있다. 회색 토기인데, 표면에 먹으로 언(言)·정(貞)·다(茶) 세 글자와 구름무늬, 꽃무늬가 그려진 찻잔이다. ‘다’라는 글씨가 있는 만큼 찻그릇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