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식민지 조선의 과학기술 전개
일제시기에 들어서야 과학기술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지식층은 과학기술의 부족이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고 자각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태도 변화는 이미 애국계몽기의 글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후 李光洙(1892∼1950)의<無情>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지식층의 의식세계라 할 수 있다. 1917년≪每日申報≫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라는 이 작품은 경성학교의 영어교사 이형식이 김장로의 딸 선형과 박진사의 딸 영채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파란만장의 이야기다. 소설 끝 부분에서 주인공 이형식은 미국에 유학하여 생물학을 공부하리라 다짐한다. 여기에 소설가 자신이 붙인 논평이 있다.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 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이란 뜻은 참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스물 다섯 나이의 이광수에게 그의 조국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아직 과학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 이광수 자신이 과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그는 이 대목으로 당시 조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과학이라는 자신과 당시 지식층의 인식을 들어 내 준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과학기술 중요성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약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은 이미 앞서고 있던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과학기술 발전에 열성이었지만, 그런 노력이 식민지에까지 펼쳐질 수는 없었다. 일본 안에서는 과학기술 발달을 위한 국가적 시책도 나오고, 그런 노력이 널리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런 노력을 그들이 식민지에까지 확대할 생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과학기술 발달은 식민지 조선인의 몫으로 남아 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일부 지식층은 조선에서의 과학기술 개발 발전에 관심을 갖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일도 있다. 중등학교 교육이 과학을 가르치면서 새로 훈련받은 과학 교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기술계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의 과학기술 진흥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고, 그런 대표적 노력의 하나는 發明學會이다.
그 대표는 金容瓘(1897∼1967)이다. 이미 1924년 발명학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던 그는 1933년≪科學朝鮮≫이라는 과학잡지를 시작하는데 주동자로 활약했고, 그 후 이 기관을 중심으로 과학 대중화 운동의 기수 노릇을 담당했다. 1930년대 조선의 과학대중화 운동은 비단 과학기술의 진흥을 위한 몸짓일 뿐만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 지식층 모두를 느슨하게나마 묶어 주었던 일종의 독립운동이다. 그 결과 1934년에는 科學知識普及會로 이를 확대하고 ‘과학 데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 행사에는 당시의 조선 지식층이 망라되어 있었으니, 소설가와 시인, 언론인, 사업가, 그리고 민족운동가까지 모두가 이름을 걸어 주었고, 김용관 등이 실제 운동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기미독립운동의 결과로 자유화 물결이 어느 정도 인정되던 시기가 지나고 있던 30년대 말에 이 민족운동은 곧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과학 데이’라는 날로 정한 날자는 1933년 4월 19일이었는데, 그 전 해가 바로 찰즈 다윈(1809∼1882. 4. 19)의 50주기였기 때문에 이 날로 정해졌다. 당시 다윈은 세계최고의 과학자로 꼽히고 있었다. 19세기말 폭발한 민족주의의 광풍이 세계를 휩쓸고 그 극에 달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란 명제가 지식층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민간 차원에서의 과학 운동이란 당시로서 큰 효과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부 식민지 지식층을 자극하고 일반에게 어느 정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 자체 식민지 조선에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는 일에는 거의 이바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조선에서는 과학자 또는 기술자로 훈련받을 기회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서양에 유학하여 과학자, 기술자로 훈련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건 속에서 태어난 대표적 경우의 하나가 그후 일제시기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꼽히는 곤충학자 石宙明(1908∼1950)이다. 그가 한 일이라면 그가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朝鮮的’인 과학을 시도한 것이다. 한국의 자연을 조사 연구하여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력으로 한국에서 사는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몫을 그는 대대적인 나비 채집과 연구로 해냈던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禹長春(1898∼1959)의 경우가 역시 해방 전후의 한국적 과학을 대표한다고 할 만하다. 그는 조선왕조에 반역자로 꼽힐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 주범의 하나인 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경대학 농대를 졸업하고 농학자로 성장했던 그는 해방 직전까지에는 상당한 수준의 육종학자로 성장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해방과 함께 모국을 찾아 귀국하여 죽을 때까지 많은 제자를 기르며 한국 농학의 기초를 다져주는데 일정하게 기여했던 것이다. 그가 가족을 버리다시피 하고 혼자 귀국하여 제자들을 기르며 살던 모습은 그의 아버지와 출생 등에 얽힌 자신의 고뇌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약간의 일화는 있었지만, 해방 전후의 한국 과학 수준이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특히 기초과학을 대표하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분야에서는 이렇다할 발전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적 상황에 맞는 그런 규모의 과학이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제적인 수준의 물리학자나 화학자란 당시로서는 전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는 하다. 이는 특히 일제시기 동안 이공계 대학 교육이 국내에서는 전혀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경성제국대학에는 해방 직전 1941년에서야 이공계가 생겨 일부 조선 학생을 선발하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까지 이들의 역할이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여 이공계를 공부하는 일이란 당시로서는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식민지 시기 동안 일본에서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한 이공계 졸업자는 겨우 204명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시기 동안 일본인 이공계 대졸자가 몇 만명인지 모르지만, 그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빈약한 인력을 가지고 해방 후 한국과 북한의 이공학은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런 빈약한 이공계 인력이 남북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는 제약이 또 하나의 심각한 난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화학 내지 화학공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대표적 식민지 조선의 과학자 李泰圭와 李升基는 해방 이후 바로 남(李泰圭)과 북(李升基)으로 갈라섰다. 이미 미약하기 짝이 없던 과학인력이 두 쪽으로 나뉜 당시 상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하면서 과학기술은 더욱 쇠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