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마제석검
石劍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의 하나로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0255) 석검에 대하여 이렇게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석기 자체가 독특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는 점 외에도 출토유물이 많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 문화의 기원이나 특성을 밝힐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탓으로 磨製石劍의 기원과 그 발생 시기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상충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마제석검에 대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도 없으며 석검의 기능이나 편년, 공반되는 다른 유물, 특히 석기류와의 상호 관련 등에 대해서는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못한 채 일반론적인 해석에 머무르고 있다.
마제석검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다원론적인 발생설과 일원론적인 발생설, 그리고 절충적 입장을 취하는 경우로 대별된다. 즉 일원론적인 입장에 있다 하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문화요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식의 석검이 발생하였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경우, 또는 다원론적인 입장에 있더라도 동시에 각종 형식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각종 형식의 석검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같은 혼란은 석검이 형태상 몇 가지로 분명하게 나뉘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
석검의 형식에 대해서 많은 이론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有莖式과 有柄式으로 구분하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유경식과 유병식의 구분은 자루의 착장이 검신과 동시에 이루어진 형태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다. 유경식은 검신의 아래, 즉 손으로 쥐는 부분이 검신보다 좁아들어 작은 꼬다리를 이루며 끝나는 것이며, 유병식은 검신의 아래부분에 손으로 쥘 수 있는 자루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석검을 크게 유경식·유병식으로 구분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이들을 다시 세분하는 데에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이같은 이견은 유병식에서 두드러진 양상을 보인다.
유경식의 경우는 견해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검신에 피홈(血溝)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또 이 경우 피홈이 있는 것이 비교적 앞서는 형식이고 없는 것은 피홈이 있는 것에서부터 파생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경식석검의 경우에는 이외에 꼬다리 부분에 있는 에어낸 홈이나 검신의 길이와 폭 등을 중심으로 다시 세분하는 경우도 있다.0256)
유병식석검의 경우에는 학자에 따라 형식분류의 기준이 다르고 또 나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쉽게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병식 석검을 자루부분의 형태, 즉 자루부분의 중간에 에어낸 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이외에 홈이 있는 부분에 홈이 파이지 않고 마디가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같은 마디를 분류의 기준으로 하여 다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자루부분의 홈을 중심으로 구분할 경우 대체로 홈이 없는 것을 一段柄式, 홈이 있는 것을 二段柄式으로 부르고 있다. 또 마디가 있는 경우에는 이를 有節柄式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병식석검에 대한 구분은 이외에도 몇 가지로 더 나뉘는데 세분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는 피홈의 존재 여부, 검신의 형태, 검신과 자루부가 만나는 부분(鐔部)의 형태 등이 있다.0257)
한편 석검으로 분류되는 것 중에는 莖이나 柄이 없는 것 등이 있어 無莖無柄式·石槍形·柳葉形·自然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이와는 달리 석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0258)
원칙적으로 석검의 형식분류의 기준은 석검에 자루가 있었을 것으로 상정하고 그 자루를 검신과 더불어 동시에 만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나누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으므로 유경식과 유병식으로 우선 구분할 수가 있다. 유병식은 다시 자루부분에 있는 홈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1단병식(무단병식)과 2단병식(유단병식)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구분은 자칫 형식만 분류하는 것으로 자루 제작의 동시성과 자루의 형태가 전체에 주어지는 분류 속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기에서는 단순화하여 유경식·1단병식·2단병식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렇듯이 연구자에 따라 석검의 분류와 명칭이 상이한 것은 석검에 대한 연구가 주로 형식분류와 편년에 집중된 데 기인한다. 따라서 석검의 형식과 그에 따른 편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편년은 기본적으로 석검의 조형에 대한 고찰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석검의 조형에 대해서는 다원론적으로 접근하는 견해와 일원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있다. 다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석검의 조형을 형식에 따라 각기 다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유경식을 피홈의 유무와 꼬다리의 길이를 중심으로 5개로 세분하고 다시 그 중 유혈구 단경식을 꼬다리의 폭에 따라 구분한 다음 청동기에서 그 조형을 구하고 있다. 즉 한국식동검(세형동검 또는 조선식동검), 한국식동과(조선식동과), 狹鋒銅鉾에서 조형을 구하고 있다. 또 유병식의 경우 2단병식은 한국식동검 혹은 한국식동과, 1단병식은 중국식동검에서 조형을 구하고 있으며 자연병식은 동 또는 철제 尖頭兵器를 조형으로 상정하였다.0259) 이외에도 다원론적 연구 중에는 유경식과 유병식을 분리하여 전자를 골검, 또는 요령식동검에서 발전된 것으로 파악하고 유병식의 경우는 청동검에서 파생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0260)
한편 일원론적 입장에서는 대체로 석검의 조형을 청동검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대상이 되는 청동검으로는 한국식동검, 요령식동검, 오르도스동검, 중국식동검 등이 있다. 그러나 한국식동검에서 석검이 파생되었을 것으로 본다면 석검의 발생연대가 한국식동검의 등장 이후가 되므로 기원전 4세기 이후가 된다.0261) 그러나 파주 옥석리 지석묘 아래층에서 조사된 집자리에서 2단병식석검이 출토되었지만, 이 집자리를 방사성 탄소연대로 측정한 결과 기원전 640년대의 것으로 판단되므로 한국식동검을 석검의 조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0262) 또 한국식동검을 석검의 조형으로 하는 경우 한국식동검에 앞서서 나타나는 요령식동검과 공반하는 석검이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식동검을 석검의 조형으로 볼 수는 없다.
요령식동검을 모방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는 요령식동검이 한국식동검에 선행하는 것이므로 연대로는 가능성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요령식동검과 유사한 석검이 없어 석검의 조형으로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요령식동검 후기 형식에서부터 유경식석검이 발생하였을 것이라는 석검 발생의 2원론적인 연구가 있으며 요령식동검의 일부 요소가 특정한 석검 형식, 예컨대 유경식석검의 발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0263)
또 석검의 조형을 오르도스동검에서 구하는 견해는 동검의 형태가 유병식석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 이 견해는 유병식석검의 발생을 비교적 잘 설명할 수는 있으나 유경식석검의 경우는 유병식석검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었다고 볼 수가 없으며 요령식동검 따위의 또 다른 동검이 제시될 수밖에 없어 결국은 다원론적인 접근이 되었다. 어쩄든 이 견해는 오르도스동검이 한반도 내에서 출토되는 예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점이 문제로 지적될 수가 있다.0264)
한편 중국식동검을 조형으로 제시하는 견해는 유경식석검의 경우는 골검이나 북방계 동기에서 발전된 것으로 파악하고, 유병식석검의 경우는 중국의 마디가 있는 동검에서 발전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중국식동검에 가장 충실한 형태를 보이는 유절병식석검이 유병식석검 중 가장 선행하는 형식이 된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파주 옥석리에서 출토된 석검이 유절병식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니는 것 같다.0265) 그러나 옥석리 석검에는 검신에 피홈이 있는데 이는 유절병식석검의 조형으로 제시된 중국식동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이 피홈은 중국식동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한반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석검이 한반도에서 많이 출토되지 않으며 지역적으로 한정된 중국 중원계 유물에서부터 발생되었다고 파악하는 것도 현재로서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석검의 조형을 주로 청동검이나 청동유물에서 찾으려는 것과 달리 골검을 조형으로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석검의 편년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조형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르게 설정되고 있다. 한편 형식에 따른 석검의 분포 양상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팽이형토기(角形土器)의 분포지역인 서북한지역에서는 유경식석검이 특징적으로 출토되며, 특히 피홈이 있는 석검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둘째 한반도의 동북지역, 즉 홍도 및 공렬토기의 발생지역인 함경도지방에서는 석검이 출토되는 예가 없다. 셋째 피홈이 있는 1단병식석검은 출토된 예가 현재까지는 보고된 바가 없다. 넷째 서남지역, 특히 최근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보성강유역의 경우 유병식석검이 대종을 이루고 있으나 유경식석검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으며 그 형식상 서북한지역의 석검과 유사한 것이 적지 않다. 끝으로 동남지역에서는 병부 끝에 장식이 있는 석검 또는 병부가 극단적으로 옆으로 넓어진 석검이 출토되는 예가 있다.
이같은 석검의 출토양상에서 몇 가지 점을 추론할 수가 있다. 첫째로 각형토기 분포지역인 서북지역과 유사한 유경식석검이 송국리형토기 분포지역인 서남지역에서 출토되는 점이다. 보성강유역의 경우 공렬토기·홍도 등과 더불어 송국리형토기가 출토되며 이는 이 지역이 충남지역을 사이에 두고 동북지역 토기의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한편으로 석검의 경우, 양자간에 유사성이 있으며 지석묘가 서북한과 서남지역에 비교적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양자간에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럴 경우 해로를 통한 문화의 전파나 교류를 상정할 수 있다.
둘째로 동남지역에서 출토되는 병부를 장식하거나 옆으로 크게 넓어지는 석검은 석검의 기능이 실용적인 것만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즉 동남지역의 석검은 석검의 기능이 실용이냐 아니면 의기로서 실용성이 없느냐를 고려하는 데 있어 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들 석검이 비실용적이고 장식적이라 하여 모든 석검이 의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토기문화의 경우 서북한을 제외하고 동북지역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북지역에서는 석검이 출토되지 않는다. 이 점은 문화가 한두 가지의 요소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전달될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 매우 의문스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석검의 조형문제와 석검의 기능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석검 중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장식적, 의례적인 것이 있다.0266) 그런데 석검 중에는 날 부분에 마모흔이 있는 것이 있으며 석검을 재가공하여 사용한 것, 즉 부러진 검신이나 자루부분을 손질하여 석검 또는 다른 도구로 전용한 것도 있다. 또 집자리 내에서 하나 이상의 석검이 출토되는 예가 있어 실제 생활용구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의기화된 것의 경우 그 출토유구가 무덤이라는 점에서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석검과 구별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석검과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석검이 형식상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무덤에서 사용흔이 없는 석검만 출토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일부 의기화되거나 퇴화된 예를 제외하고는 의기로서의 석검과 실용품으로서의 석검을 형식에 따라 구분할 수가 없고 개개 석검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사용 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다만 비교적 시기가 늦은 유적에서 의기로서의 석검이 출토되는 점에서 석검이 후기에 무덤에 부장되는 기능을 위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도 집자리에서는 후기에도 여전히 퇴화된 석검이 출토되고 있으며 사용한 흔이 남아 있어 계속 실용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석검은 초기에는 실용품으로 사용되면서 동시에 무덤에 부장되기도 하다가 후기에 들어서 부장품으로서의 석검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같은 변화는 실용품으로서의 석검이 그 기능을 얼마간 다른 도구에 의하여 대체되는 시기를 전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석기들의 경우에서의 변화와 관련될 것으로 파악된다.
석검 중에 의기적인 것이 있으나 그 본래적인 기능은 실용품이라 할 경우 실생활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겠는가 하는 점이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부터가 검이라는 점에서 무기로서의 기능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무기로 사용되었을 경우 창과 화살촉과는 달리 석검은 근거리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검의 본래적 용도는 베거나 찌르는 것으로 상정할 수가 있는데 석검이 근거리에서 찌르는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용흔이 있는 석검 중에는 끝부분이 날카롭지 못하여 찌르는 데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파손된 것을 재생하여 사용할 경우에도 끝부분을 날카롭게 하지 않은 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석검이 찌르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기에는 석질이 무른 것이 적지 않으며 부드러운 것이라면 몰라도 움직이는 생체를 찌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석검으로 생체를 찔렀을 경우 기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피홈은 실제적 기능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피홈이 기능을 하고 석검이 찌르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석검 중에는 피홈이 없는 것이 많으며 그것들 중에는 사용흔이 있는 것이 적지 않다. 따라서 석검을 무기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찌르는 용도를 가진 것으로는 볼 수가 없으며 찌르는 기능보다는 베는 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은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검의 경우 양측면 날이 손상되었다는 점에서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근거리에서 생체를 베는 데에는 역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어서 석검이 비록 청동검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생체를 훼손하는 데에 사용되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검을 생체를 찌르거나 베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용도가 무엇이었을까.0267)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얻지 못했으나 석검의 양측면에 손상된 흔적이 있는 것이 많고 집자리 내부에서 출토될 경우 1점만이 아니라 여러 점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기초하여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접근은 생태환경의 차이에 의하여 어느 정도 문화요소 중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대체로 비슷한 생활양상을 지녔을 것으로 추론되는 함경도지방의 경우가 참고될 수 있다. 즉 함경도지역의 경우 석검이 없다는 것은 석검이 지니고 있었을 기능을 가진 도구가 별도로 있었거나 그같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경우 중 함경도지역이 한반도 내 다른 지역과 생활양상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석검이 가지고 있었을 기능을 가진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는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도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같은 추론이 타당하다면 함경도지방에서 석검을 대신하는 도구로 골검이 제시될 수가 있다.0268)
골검을 석검, 특히 유경식석검의 조형으로 파악하는 연구는 이미 있었으며 특히 유경식석검의 경우는 그같은 가능성이 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골검을 석검의 조형으로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것은 유병식석검의 경우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따라 골검을 유경식석검의 조형으로 파악하는 경우에도 유병식석검은 다른 유물에서 파생된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고 결국 석검의 조형에 대하여 다원론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경식석검에는 어떤 형태이든 자루가 부착되어 사용되었을 것이고 유병식석검은 자루가 부착되어 있는 유경식석검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0269) 또 석검에서 보이는 피홈에 대하여 이를 골검에서 보이는 속성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골검은 대롱형의 동물뼈로 제작되었고 그로 인하여 마연한 다음에도 홈이 남게 되며 이 홈이 석검으로 제작되면서 피홈의 형태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0270)
유경식석검에 자루가 부착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송국리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집자리에서는 유경식석검에 나무 자루가 달려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자루가 부착된 형태는 1단병식 석검형태이다.0271) 따라서 유경식석검에 자루가 부착되어 있었고 유경식석검의 꼬다리부분에서 보이는 구멍이나 에어낸 홈과 같은 것들은 자루를 부착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유경식석검이 골검에서 비롯되었고 유병식석검은 자루가 부착된 유경식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청동검이 석검의 형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좋은 예가 석탄리유적에서 출토된 석검으로 이 유적에서 출토된 석검은 요령식동검의 검신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0272) 이처럼 석검 중에는 동검이나 다른 유물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으나 발생 자체는 동북지방과는 달리 돌로 검을 만들게 된 것으로 추론해두고자 한다. 그리고 이같은 추론을 바탕으로 한반도 동북지역에 접한 연해주지역의 석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0273)
0255) | 平井尙志,<沿海州出土の磨製石劍について-朝鮮出土例との比較と檢討>(≪朝鮮學報≫18, 1961). 有光敎一,≪朝鮮磨製石劍の硏究≫(京都大 文學部 考古學叢書 2, 1959). ―――,<朝鮮磨製石劍の年代論について>(≪史林≫51-4, 1968). 金元龍,<韓國 磨製石劍起源에 關한 一考察>(≪白山學報≫10, 1971). 金良善,<再考를 要하는 磨製石劍의 形式分類와 祖形考定의 問題>(≪梅山國學散稿≫, 崇田大 博物館, 1972). 甲元眞之,<朝鮮半島の有莖式磨製石劍>(≪古代文化≫24-7, 古代學協會, 1972). ―――,<朝鮮半島の有柄式磨製石劍>(≪古代文化≫24-9, 1973). 尹德香,<韓半島 磨製石劍의 一考察>(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77). 金英夏,<磨製石劍存疑>(≪考古美術≫136·137, 한국미술사학회, 1978). ―――,<磨製石劍의 祖形에 關하여>(≪韓國史硏究≫24, 1979). 金昌鎬,<有柄式石劍 形式分類試論>(≪歷史敎育論集≫2, 慶北大, 1981). 全榮來,<韓國磨製石劍·石鏃編年에 關한 硏究>(≪馬韓·百濟文化≫4·5, 圓光大, 1982). 鄭聖喜,<慶南地方 磨製石劍에 關한 硏究>(동아대 석사학위논문, 1984). 沈奉謹,<日本 彌生文化 初期의 磨製石器에 대한 硏究>(≪嶺南考古學≫6, 1989). 李白圭,<慶北大 博物館 所藏 磨製石劍, 石鏃>(≪嶺南考古學≫9, 1991). 金仙宇,<한국 마제석검의 연구 현황>(≪韓國上古史學報≫16,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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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6) | 有莖式石劍에 대하여는 피홈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외에 꼬다리의 크기와 형태, 검신의 형태에 의하여 세분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들의 견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金良善은 위의 글에서 꼬다리의 크기에 따라 長莖式과 短莖式으로 구분하고 다시 각각을 피홈(甲元眞之나 金良善의 용어에 의하면 樋)의 유무에 의하여 세분하였으며 다시 장경식 중 검신에 등대가 있는 것을 별도의 형식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有樋短莖式, 無樋短莖式, 有樋長莖式, 無樋長莖式, 高鎬長莖式으로 구분되는데 이 중 無樋短莖式은 다시 꼬다리의 폭을 기준으로 無樋細短莖式과 無樋廣短莖式으로 세분하고 있다. 한편 全榮來는 꼬다리의 형태 외에 검신의 형태에 주목하여 弧刃平短莖, 長莖, 有溝(孔)莖式으로 구분하고 이외에 有莖有稜式, 有樋有莖式을 설정하였다. |
0257) | 有柄式을 다시 세분하는 몇 가지 견해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金良善은 유병식을 설정하지 않고 크게 1단병식과 2단병식으로 나누고 2단병식은 피홈의 유무를 중심으로 유통·무통으로 구분하고, 1단병식은 절의 유무를 기준으로 유절1단병·무절1단병으로 구분하였다(金良善, 위의 글). 甲元眞之는 유병식석검을 2단병식과 1단병식으로 구분하는 외에 마디를 중심으로 구분하여 유병식석검을 크게 3분하고 그들 각각을 다시 피홈을 기준으로 세분하였다(甲元眞之, 앞의 글). 全榮來는 유병식을 크게 有節柄·有段柄·無段柄·棒狀柄·無柄首로 구분하고 유병식 중에 다시 장경과 단경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외에 鋌을 기준으로 유정유병·무정유병식을 설정하였다(全榮來, 위의 글, 91쪽 참조). |
0258) | 石槍과 石劍의 구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全榮來, 위의 글. 尹德香, 앞의 글. 崔夢龍 외,<驪州 欣岩里 先史聚落址 出土 石器類 Ⅱ>(≪古文化≫26, 한국대학 박물관협회, 1985). |
0259) | 金良善, 앞의 글. |
0260) | 全榮來, 앞의 글. |
0261) | 有光敎一, 앞의 책. |
0262) | 金載元 외,≪韓國支石墓硏究≫(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6, 1967). |
0263) | 金元龍, 앞의 글. |
0264) | 金元龍, 위의 글. 尹德香, 앞의 글. |
0265) | 全榮來, 앞의 글. |
0266) | 석검을 형태에 따라서 의기화(장식화)된 것, 정형화된 것, 그리고 퇴화된 것으로 나누는 견해도 있다(李榮文,≪全南地方 支石墓 社會의 硏究≫, 한국교원대 박사학위논문, 1993). |
0267) | 석검이 청동검과 공반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석검을 神刀, 즉 切開를 위한 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다(朴容淑,≪韓國 古代美術 文化史論≫, 一志社, 1976). |
0268) | 석검의 조형을 골검에서 구하는 견해는 全榮來의 앞의 글이 있다. 이외에도 김용간,<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년대론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고고민속≫1964-2,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에서는 돌창끝이나 골검에서 석검이 발생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
0269) | 沈奉謹, 앞의 글. |
0270) | Ю. М. БуТИН 지음;이항제 외 번역,≪고조선≫(서울 소나무, 1990). |
0271) | 國立中央博物館,≪松菊里≫Ⅲ(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9, 1987). |
0272) | 韓永熙,<角形土器考>(≪韓國考古學報≫14·15, 1983). |
0273) | T. N. 安德烈耶夫,<在大彼得灣沿岸及其島嶼上發現的公元前第二至第一千年的遺蹟>(≪考古學報≫4, 19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