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요령식동검문화기의 청동기
우리 나라의 요령식동검문화는 중국 요령지방의 요령식동검문화에 비해 다소 단순한 내용을 보인다. 무기류로는 동검·동모·동촉만 보이며, 공구류로는 도끼(銅斧)·끌·손칼 등이 있을 뿐 의기류나 마구류·장신구류는 보이지 않는다.
가) 무기류
(가) 요령식동검
琵琶形銅劍·滿州式銅劍·曲刃靑銅短劍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중국의 동북지방, 특히 현재의 요령성 관내에 집중 분포되어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함북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 이 동검은 劍身과 손잡이를 따로 만든 뒤 그것을 조립하여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소위 ‘別鑄式’의 것으로 중국식동검이나 오르도스식동검들처럼 검신과 손잡이가 함께 주조된 一鑄式의 동검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형적인 검신의 형태는 양 인부의 상부쪽이 튀어나와 돌기를 형성하고 있고 그 아래쪽은 좁혀지다가 아래쪽에서 다시 둥글고 넓게 퍼져 전체적으로 비파의 형태를 가진 것이다. 검신 상부의 돌기부와 동일한 위치의 등대에는 脊突이 형성되어 있으며 경부는 긴 편이고 측면에 얕은 홈을 낸 것도 있다. 전형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에는 인부가 曲刃으로 처리되지 않은 것도 있고, 척돌이 보이지 않은 것도 있다. 이 중 경부에 홈이 파진 형식은 요령지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중부 이남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는 특수형식이다.0285) 검신의 형태는 후기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거나 척돌이 희미해지며 돌기부가 없어지는 등 전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난다.
요령식동검의 검신과 따로 주조해서 조립하게 되어 있는 손잡이는 T자형의 특징적인 검파이다.0286) 현재까지는 그 출토례가 적어 재령 고산리유적 출토품과 信川 출토로 전해지는 2점, 그리고 황해도 출토의 3점만이 알려져 있다.0287) 발견된 동검 수에 비해 손잡이 수가 적은 것은 목제손잡이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손잡이는 손으로 쥐는 筒部와 劍把頭飾을 올려 놓게 되어 있는 盤部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대가 내려가면 반부의 양단이 통부쪽으로 처지는 경향을 보인다. 검파두식은 반부위에 올려 놓은 장식 또는 칼로 찌를 때 중력을 가하기 위한 加重器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0288) 철광석·청동 등의 재질이 사용되었다.
(나) 요령식동모
요령식동검에 비해 수량이 적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다. 동검과는 달리 경부 대신에 銎部가 달려 있다. 우리 나라에서 현재까지 거푸집을 포함해서 모두 13점이 발견되었다.0289)
여천 적량동·傳 보령 출토품0290)과 같이 身部의 폭이 좁고 공부의 길이가 길며, 刃部와 나란하게 隆線文이 돌려진 동모(Ⅰ류)와 영흥읍 출토품0291)과 같이 신부의 폭이 전체 길이에 비해 넓은 것(Ⅱ류), 그리고 평양 출토품0292)과 같이 인부의 굴곡이 심하지 않은 것(Ⅲ류)이 있다. Ⅰ류는 吉林·長春지구의 永吉 星星哨水庫 석관묘 출토품0293)과 유사하며, Ⅱ류는 길림의 長蛇山유적 출토품0294)과 가깝다. 그러나 Ⅰ류는 중서부 이남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有溝莖式의 요령식동검과 함께 지역적 특색을 보여 주는 형식일 가능성이 많다. 遼西지구의 요령식동검문화 유적에서도 동모가 보이지 않으나, 이것은 인부가 버들잎형이고 공부의 측면에 귀가 달린 것이라 큰 차이를 보인다. 거푸집은 함남 영흥읍(현 金野邑)유적과 강원 통천군 鉢山유적에서0295) 출토된 것이 있다. 요서지구에서도 요령식동모와 같이 공부를 가진 비파형의 청동무기가 있으나, 이것은 공부의 깊이가 깊지 않고 공부의 단면도 菱形인 것이 많아 중국에서는 曲刃銎柄式短劍으로 분류되어 있다.0296)
(다) 동촉
동검·동모에 비해 발견된 예가 적다. 요령식동검과 함께 출토된 동촉으로는 백천 대아리 석관묘의 有莖兩翼鏃 1점뿐이다.0297) 피홈이 나 있고 양익의 끝이 逆刺式을 이룬 이러한 형식의 동촉은 사리원시 상매리 석관묘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데0298) 함께 출토된 석촉들도 대아리유적 출토품과 같은 형식의 것이라 동일한 요령식동검문화 단계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경양익촉 외에 2段莖式의 동촉이 은천 약사동 북방식고인돌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배천 홍현리 석관묘와 김해 무계리 남방식고인돌(석관묘?), 보성 덕치리 15호 남방식고인돌에서는 유경동촉이 출토되었다.0299) 이 중 덕치리 출토품은 요령식동검편을 갈아서 만든 2차 轉用品이다. 이 밖에 강릉시 포남동 주거지유적에서0300) 출토된 동촉도 함께 나온 석검과 석촉으로 보아 이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촉신 단면이 八菱形을 이룬 특이한 것으로 경부는 2단으로 된 유경양익촉이나 역자식은 아니다.
이 동촉들 외에 이 시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식동촉이 몇 점 있는데 경주에서 발견된 유경양익촉 중에는 중국 陝西省 張家坡의 西周住居址에서 출토된 양익촉과 동일한 형식의 것도 있다.0301) 이러한 동촉은 요서지방의 夏家店 上層文化유적에서 요령식동검과 반출되는 것이어서 우리 나라 요령식동검문화의 유입배경과 상한을 상정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라) 중국식동검
중국 춘추시대 후기부터 漢代에 걸쳐 사용된 중국식동검이 전국시대부터 유입된 것으로 믿어진다. 요령식동검문화기 후기 유적인 재령 고산리유적에서 퇴화형식의 요령식동검과 공반된 중국식동검이 있다.0302) 이 동검은 손잡이에 마디가 2개 있는 有節柄式으로, 손잡이의 횡단면이 볼록렌즈형이라 중국에서 들어온 동검이 아니고 우리 나라에서 모방하여 제작한 倣製品으로 믿어진다.0303)
나) 공구류
(가) 도끼
소켓이 있는 도끼(銎斧)로는 날이 부채꼴로 퍼진 扇形도끼(銅斧)와 전체적으로 장방형을 띤 長方形도끼가 있다. 선형도끼는 의주 미송리,0304) 김야 영흥리(거푸집), 부여 송국리(거푸집)유적0305)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선형도끼는 요령지방의 요령식동검문화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요서지구보다 요동지구에서 더 많이 보인다. 장방형도끼는 고산리유적에서 발견된 1점이 있을 뿐이다.
(나) 끌
이 시기의 끌(銅鑿)로는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것 1점과 평양 금탄리 8호 집자리0306)에서 출토된 1점이 있다. 송국리 출토품은 요령식동검의 경부편을 갈아서 만든 2차 전용품이며 금탄리 출토품은 두께가 얇고 폭이 약간 넓은 평편한 것으로 소켓이 없다. 요령지방에서 보이는 공부가 있는 형식은 아직 출토되지 않았다.
(다) 손칼
손칼(刀子) 역시 개천 용흥리유적0307) 출토품 1점과 용천 신암리 출토품 1점이 있을 뿐이다. 용흥리 출토품은 손잡이에 돌기가 나 있는 형식으로, 이러한 형식은 요령지방에서는 夏家店 上層文化에서 주로 보이는 것이다. 신암리 출토품은 環頭가 달린 것이나 요령식동검문화와의 관련 여부는 불확실하다.
다) 기타
(가) 단추
단추 모양의 장식품인 銅泡의 뒷면에는 작은 고리가 부착되어 있어 가죽이나 천에 꿰매어 달 수 있다. 강계 풍용리 석관묘, 봉산 신흥동 집자리, 나진 초도유적에서 발견되었다.0308) 단추의 周緣部에는 短線文이 시문되어 있다. 沈陽 鄭家窪子 등 요령지방의 유적에서는 활집이나 장화 등에 부착되어 출토되었다.0309)
(나) 방울
이 시기의 방울(銅鐸)로는 나진 초도유적에서 출토된 1점과 금야 영흥읍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이 있다. 같은 형식의 것으로 전체적으로 截頭圓錐形을 띤다. 하부와 중앙상부에 횡으로 M자 또는 삼각거치상의 문양대가 돌려져 있다. 영흥읍유적에서는 요령식동모의 거푸집이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들 방울이 요령식동검문화기에 속하는 유물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초도유적에서 출토된 동제대롱구슬(管玉)·가락지·장식품 등이 있다.0310)
0285) | 李健茂,<韓國의 靑銅器文化>(≪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 汎友社, 1992), 12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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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6) | 秋山進午,<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器文化樣相(上)>(≪考古學雜誌≫53-4, 日本考古學會, 1968), 13쪽. |
0287) | 原田淑人·駒井和愛,≪牧羊城≫(東亞考古學會, 1931), 55쪽. 秋山進午, 위의 글, 17쪽. 황기덕,<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고고학자료집≫4, 사회과학출판사, 1974), 159∼161쪽. |
0288) | 靳楓毅,<朝鮮地區發現的檢柄端加重器及其相關遺物>(≪考古≫2, 中國科學出版社, 1983), 113쪽. |
0289) | 李健茂,<遼寧式銅矛에 대하여>(≪李基白先生古稀紀念論叢≫上, 一潮閣, 1994), 2∼19쪽. 류병흥,<단군 및 고조선 시기의 유적유물 발굴성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1,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5쪽. 김종혁,<표대부락터유적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6-2), 22∼25쪽. |
0290) | 慶熙大 博物館,≪博物館圖錄≫(敎學社, 1986), 27쪽. |
0291) | 서국태,<영흥읍 유적에 관한 보고>(≪고고민속≫1965-2), 35∼45쪽. |
0292)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조선유적유물도감≫2;고조선·부여·진국편(1989), 250쪽. |
0293) | 吉林市文物官理委員會 外,<永吉縣星星肖水庫石棺墓及遺址調査>(≪考古≫3, 1978), 147쪽. |
0294) | 吉林省文物工作隊,<吉林長蛇山遺址的發掘>(≪考古≫2, 1980), 131쪽. |
0295) | 澤俊一,<鎔范出土の二遺蹟>(≪考古學≫8-4, 東京考古學會, 1923). |
0296) | 靳楓毅,<論 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上)>(≪考古學報≫4, 1982), 414쪽. |
0297) | 리규태,<배천군 대아리 돌상자무덤>(≪고고학자료집≫6,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176쪽. |
0298) |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황해북도 사리원시 상매리 석관묘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2, 1959), 41∼42쪽. |
0299) | 尹德香,<德峙里 신기支石墓>(≪住岩댐水沒地域 文化遺蹟調査報告書≫Ⅲ, 全南大博物館·全羅南道, 1988), 91쪽. |
0300) | 李蘭暎,<江陵市 浦南洞出土 先史時代 遺物>(≪歷史學報≫24, 1964), 163쪽. |
0301) | 東洋學學術會,≪梅原考古資料目錄 朝鮮之部≫(1966), 1569번. |
0302) | 황기덕, 앞의 글. |
0303) | 李健茂, 앞의 글. |
0304) | 김용간,<미송리 동굴유적 발굴중간보고(Ⅰ)>(≪문화유산≫1961-1, 과학원출판사), 45∼47쪽. |
0305) | 姜仁求 외,≪松菊里≫Ⅰ(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국립중앙박물관, 1978), 90∼91쪽. |
0306) | 김용간,≪금탄리 원시 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0,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
0307) | 韓柄三,<傳 龍興里出土 銅劍과 伴出遺物>(≪考古學≫1, 韓國考古學會, 1968), 62∼64쪽. |
0308) | 정백운·도유호,≪라진초도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 과학원출판사, 1956), 45쪽. |
0309) | 沈陽故宮博物館 外,<沈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考古學報≫1, 科學出版社, 1975), 147∼148쪽. |
0310) | 정백운·도유호, 앞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