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국식동검문화기의 청동기
우리 나라 전기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요령식동검문화라고 할 때, 후기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韓國式銅劍·銅矛·銅戈·多鈕鏡·儀器 등을 표지적인 유물로 하고 있는 한국식동검문화이다. 이 문화는 중국 요령성지역을 중심으로 한 요령식동검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었으나 이후 소위 ‘北方地域’의 청동기문화 및 중국 청동기문화 요소도 받아들이면서 한국식청동기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요령식동검문화 단계의 문화내용보다 훨씬 다양한 내용을 보여, 청동기에 새롭게 의기류가 등장하고 무기류·공구류에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다.
가) 무기류
(가)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은 요령식동검을 조형으로 하고 있어 서로 공통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두 동검을 비교해 보면 첫째 크기가 비슷한 단검이고 검신과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조립한 별주식인 점, 둘째 抉入部가 형성된 점, 셋째 손잡이가 T자형을 이루고 盤部 위에 검파두식을 착장하고 있는 점 등이 공통점이다. 차이점은 검신이 직선화되고 예리해진 점이며 요령식동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마디가 뚜렷해지는 것도 큰 특징이다. 평안북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인 분포를 가지며 함경북도의 북쪽인 연해주지역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0311)
이 동검의 형식은 크게 Ⅰ식·Ⅱ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0312) Ⅰ식검은 등대에 세운 능각(鎬)이 마디까지만 나 있는 것이며, Ⅱ식검은 그것이 基部 또는 莖部까지 나 있는 것이다. Ⅰ식검과 Ⅱ식검의 선후관계는 Ⅰ식검이 앞선 것이지만, Ⅰ식검이 Ⅱ식검의 시기까지 계속 제작되었기 때문에 동검의 형식만으로 어느 것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지 논하기는 힘들다. 손잡이는 목제가 많은 탓에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원삼국시대의 청동제·목제검파를 통해 보면 요령식동검의 T자형 손잡이와 아주 유사하다. 검파두식은 대부분이 석제이며 철광석제가 많다. 형태는 瓜形·十字形·立柱附十字形의 것이다.
(나) 동모
銅鉾는 자루를 끼울 수 있게 공부를 가진 것으로 한국식동검문화기의 발전기에 등장한다. 초기의 것은 대부분이 길이 20㎝ 전후한 짧은 동모이다. 無耳有穿式으로 공구쪽에 한 줄의 돌대가 있다. 중국동모를 祖型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믿어지나 등대의 마디, 關部의 형태, 穿의 위치 등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최근에는 요령식동모의 출토례가 늘고 있어 조형문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후기에는 공부의 측면에 環耳가 붙거나 길이가 길어지며 공부의 표면에 문양을 새기거나 피홈의 수가 많아지기도 한다.
(다) 동과
銅戈는 긴 자루에 옆으로 직각이 되게 결박하여 찍거나 베는 데 사용한 무기로 중국에서는 殷·周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병기의 하나로 사용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동과도 중국의 것을 조형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으나, 동모와 마찬가지로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동과의 형식은 등대에 稜角이 나 있는 것과 능각이 나 있지 않은 것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으나 양 형식의 선후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피홈 내부에 문양을 새긴 것도 있으며, 신부의 단면이 능형으로 되어 있는 것, 즉 피홈이 없는 것도 있다.0313)
이 밖의 무기류로는 중국식동검·중국식동모 등이 있다. 중국식동검은 평양 석암리에서 ‘秦始皇二十五年’銘(B.C. 222년) 동과와 함께 1점, 완주 상림리에서 26점, 함평 초포리에서 한국식동검 등과 함께 1점이 출토되었다.0314) 이 밖에 평양·익산·해미·경주 출토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다. 상림리·초포리·전 해미 출토품들은 모두 손잡이의 횡단면이 렌즈형에 가까워 중국식동검을 모방해 만든 倣製品으로 보여진다. 중국식동모는 출토례가 적고, 단독으로 발견된 것들이 많아 내용을 잘 알 수 없다. ‘五年季氏’銘이 있는 秦의 동모가 秦戈와 함께 평양 출토로 전하고 있다.0315)
나) 공구류
(가) 도끼
이 시기의 도끼(銅斧)로는 扇形銅斧·有肩銅斧·長方形銅斧·蛤刃銅斧 등이 있다. 선형동부는 요령식동검문화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길이 7㎝ 미만의 소형이며 도끼라기보다는 자귀와 같은 것이다. 전주 여의동 石蓋土壙墓(石棺墓?)·아산 남성리 石棺墓·신계 정봉리 石槨墓·속초 조양동 1호 支石墓0316)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한국식동검문화가 성립기의 표지적인 유물이며 단면 편육각형의 無莖鏃과 공반되는 경우가 많다.
유견동부는 남성리유적 출토 도끼와 같은 선형동부에서 변화한 형식으로 추정된다. 공부에서 신부에 이르는 부분이 弧線을 그리며 어깨를 형성하고 곧게 뻗은 身部는 直刃의 인부와 연결된다. 인부는 順安 출토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單刃이라서 도끼보다는 자귀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0317) 화순 대곡리·함평 초포리유적에서는 동검·정문경·동사·동령류 등과 공반되었으며, 영암지방 출토로 전하는 일괄의 거푸집0318) 가운데에도 3개분의 유견동부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식동검문화 발전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장방형동부는 유견동부보다 다소 크다. 공구 주위에는 3∼4조의 突線이 돌려져 있는 경우가 많고, 신부의 중간부분은 잘룩하다. 신부 상면의 한쪽 표면에는 소형의 고리가 부착된 경우도 있다. 부여 구봉리유적0319)을 비롯해 봉산 송산리유적0320) 등에서 발견되었으며 영암 출토로 전하는 거푸집에도 이 장방형동부가 포함되어 있다.
합인동부는 공부에서 신부에 이르는 부분이 유견동부와 같이 호선을 그리며 어깨를 형성한 것이나, 신부가 둥글며 특히 인부가 조갯날인 점이 특징적이다. 구봉리유적과 송산리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영암 출토로 전하는 거푸집에서도 보인다. 湖巖美術館 소장품에는0321) 신부 상면의 한쪽 표면에 소형의 고리가 부착되어 있다.
(나) 동착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銎部를 지닌 銅鑿은 길이 10㎝ 전후의 가늘고 긴 형태로 대부분이 공구 주위에 突帶를 돌렸다. 신부의 단면이 사각형에 가까운 것과 육각형에 가까운 것의 2종류가 있으나 대부분 단면 사각형의 것이고 남성리유적 출토품만이 단면 육각형이다.0322) 공부가 길고 두터운 동착도 있는데 대전 탄방동,0323) 傳 공주,0324) 남성리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렇게 공부가 길고 두터운 형식은 요령지방의 崗上유적0325)출토 거푸집에서도 보여 시기적으로 이른 형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동착들이 어느 지역의 동착과 관련이 깊은지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으나 요령지방에서는 요령식동검과 함께 동착이 발견되는 예가 많아 그 쪽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 동사
조각을 하기 위한 공구인 銅金㐌는 중국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대체로 전국시대 초의 영역인 양자강유역에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동사는 대체로 3종류로0326) Ⅰ류는 중간부의 단면이 삼각형을 이루고 신부의 위아래 폭이 거의 같게 곧게 내려갔으며 길이가 짧고 폭이 좁다. Ⅱ류는 중간부의 단면이 볼록렌즈형이며 선단부가 이등변삼각형에 가깝고 신부의 폭은 아래쪽이 좁다. Ⅲ류는 중간부의 단면이 초생달형이다. 이러한 동사는 화순 대곡리유적의 예로 보아 동모·동과가 출현하기 직전단계에 출현해서 철기시대 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고 믿어진다.
동사의 분포는 북으로는 연해주의 이즈웨스토프부터0327) 남으로는 김해까지 전국적이다. 거푸집으로는 영암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1점이 있는데 조각되어 있는 면이 경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라) 송곳
송곳(銅錐)의 출토례는 아주 적어 실물로는 연해주의 이즈웨스토프유적에서 출토된 것 1점과 영암 출토로 전하는 거푸집의 5점뿐이다. 폭 0.5㎝ 정도의 가늘고 긴 동추는 일단이 뾰죽하고 단면이 심각형이거나 사각형이다. 이러한 동추는 요령지방에서 출토된 요령식동검의 거푸집에도 새겨져 있어0328) 요령식동검문화의 전통을 이은 것이 확실하다.
다) 의기류
(가) 동경
중국의 거울이 중앙에 1개의 꼭지를 가졌고 대부분 경면이 튀어나온 볼록거울인데 비해 우리 나라의 동경(多鈕鏡)은 꼭지가 가장자리에 치우쳐 2∼3개 달렸고, 경면이 약간 오목하다. 꼭지가 달린 뒷면의 문양은 集線이 채워진 三角文과 같은 기하학적 문양이 특징이다. 이 다뉴경은 얼굴을 비추어 보는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종교적·주술적 의식에 사용한 의기의 하나로 추정된다. 요령지방의 朝陽 十二臺營子遺蹟을 비롯해 沈陽·本溪 등지에서 古式의 다뉴경들이 요령식동검들과 반출되고 있어,0329) 우리의 다뉴경도 이 요령지방의 다뉴경을 조형으로 하여 출현한 것으로 믿어진다.
다뉴경은 그 문양의 粗·精에 따라 粗文鏡과 精文鏡으로 구분되는데 조문경이 먼저 출현한 형식이다. 조문경은 지그재그를 이룬 雷光形의 문양에서 점차 星形文으로 변화해 가고, 문양의 배치도 內·外區의 구분이 없는 것에서 구분되는 쪽으로 변화해 가며, 周緣도 대체로 단면 삼각형에서 반원형으로 바뀌어 간다. 정문경은 조문경에서 발전하여 선문이 보다 정교하다. 1㎜ 폭에 2∼3조의 선문이 채워져 있을 정도로 뛰어난 제도기법을 보여준다. 대체로 文樣區를 外·中間·內의 3부분으로 구분하여 單位文樣을 시문하였다.0330) 화순 대곡리 출토경·숭실대학교 소장경과 같이 문양이 곱고 복잡한 구성을 가진 정문경에서 점차 문양이 간략화되고 문양구도 외구·내구의 구분만 있는 거울로 변천되었다. 또 지름 10㎝ 내외의 소형경의 제작 증가와 주연부 및 꼭지의 폭이 거울 크기에 비해 다소 넓어진 점 등이 후기 정문경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이형동기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기에 용도를 잘 알 수 없는 異形銅器들이 출현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같은 계통의 단위문양을 가지고 있고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가진 儀禮에 사용된 도구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防牌形銅器·劍把形銅器·肩甲形銅器·喇叺形銅器·圓形有文銅器 등이 있다.0331)
방패형동기는 상변에 현수용의 방형 구멍을 가진 것으로 의복같은 데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패형동기의 하나인 농경문청동기0332)에는 밭을 경작하는 인물과 수확하는 인물, 그리고 매와 같은 새가 묘사되어 있어 이 유물이 생산의 풍요를 비는 주술적 의미가 담긴 의기임을 알려 주고 있다.
검파형동기는 대나무를 세로로 쪼개 놓은 형태의 청동기로 3점이 세트를 이룬다. 예산 동서리와 아산 남성리유적에서 출토된 것에는 표면에 사슴과 사람의 손이 표현되어 있어 시베리아 일대의 샤머니즘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견갑형동기는 경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1점뿐이다.0333) 문양이 새겨진 표면이 불룩하게 튀어 나와 있고 뒷면에는 부착용의 꼭지 4개가 달려 있다. 화살에 맞은 사슴과 표범같은 동물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역시 수렵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된다. 요령지방에서는 이러한 동기가 도끼를 담는 주머니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0334)
나팔형동기도 동서리유적 출토품이 유일한데0335) 1쌍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 원추형 위에 管狀의 것이 부착된 형태이며 원추형의 내면에는 물체에 부착하기 위한 꼭지가 달려 있다. 표면에는 突點線文과 삼각연속거치문이 새겨져 있어 의기임을 짐작케 해준다. 요령지방의 정가와자유적에서는 말머리장식으로 출토된 바 있다.
원형유문동기는 익산지방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1점이 있다.0336) 오목거울의 형상으로, 볼록한 뒷면의 중앙에는 꼭지가 하나 달려 있어 의복 같은 데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표면에는 短斜線文, 小形三角文, 突點線文 등을 이용하여 十字日光文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십자일광문의 모티프는 동경·방울·단추·수레부속구 등에서도 보이고 시베리아의 민속품에도 보인다.0337)
이상의 이형동기들은 한국식동검문화 성립기에만 보이는, 그리고 충남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지역에서 집중 출토되는 점이 특징이다. 요령지방의 요령식동검문화요소에 북방문화요소가 가미된 특이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다) 동령류
앞의 이형동기들이 한국식동검문화 성립기의 대표적인 의기라고 할 때 銅鈴類는 발전기의 대표적인 의기라고 할 수 있다. 초기에는 八珠鈴·雙頭鈴·組合式雙頭鈴·竿頭鈴의 4종이 세트를 이루나 철기시대 후기에 이르면 간두령만 남게 된다.0338)
이들 방울의 표면에 시문된 문양의 단위를 보면 이형동기의 그것과 공통되므로 의기로 보아 무리가 없다. 모두 꼭지나 공부·구멍 등이 있어 매달거나 끼워서 흔들어 소리가 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동령류는 중국의 중원지방, 요령지방, 일본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한반도 특유의 유물이다.
(라) 동탁
내부에 혀(舌)가 매달려 있는 종방울(銅鐸)은 횡단면이 타원형인 원통형의 鐸身 상부에 둥근 고리가 달려 있다. 몸통의 측면에는 주조할 때 內型을 받치기 위한 것이었던 소형의 받침구멍이 나 있다. 후기의 동탁은 몸통 하부가 약간 벌어지는 경향을 띤다. 의복에 부착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巫具의 일종으로 믿어진다. 크기는 9∼16㎝ 정도로 다른 의기들과는 달리 素文인 점이 특징이다.
라) 기타
이 밖의 청동유물로는 장식단추와 낚싯바늘 등이 있다. 장식단추로는 다송리 석관묘유적 출토품과 삼봉유적 출토 거푸집에 새겨진 것을 들 수 있다.0339) 요령식동검문화기 이래 계속 사용되었으나 성행하지는 않은 듯하다. 낚싯바늘은 실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영암 출토로 정해지는 거푸집에 새겨진 것이 유일하다.0340) 요령지방의 요령식동검문화 유적에서도 출토되어 이 지역과 관련이 깊은 유물로 추정된다.
<李健茂>
0311) | 平井尙志,<沿海州新出土の多鈕細文鏡とその一括遺物について>(≪考古學雜誌≫46-3, 1960), 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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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 | 尹武柄,<韓國靑銅短劍의 型式分類>(≪震檀學報≫29·30, 1966). |
0313) | 國立中央博物館·國立光州博物館,≪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汎友社, 1992), 79쪽. |
0314) | 李健茂·徐聲勳,≪咸平草浦里遺蹟≫(國立光州博物館·全羅南道·咸平郡, 1988), 25쪽. |
0315) | 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 32∼33쪽. |
0316) | 1992년 江陵大學校 發掘品. |
0317) | 李健茂,<韓國 靑銅儀器의 硏究>(≪韓國考古學報≫28, 韓國考古學會, 1992), 168쪽. |
0318) | 林柄泰,<靈巖出土 靑銅器鎔范에 對하여>(≪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一志社, 1987), 122∼123쪽. |
0319) | 李康承,<扶餘 九鳳里出土 靑銅器 一括遺物>(≪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Ⅰ), 148쪽. |
0320) | 황기덕,<1958년 춘하기 어지돈지구 관개공사구역 유적정리 간략보고(1)>(≪문화유산≫1959-1, 과학원출판사), 46∼52쪽. |
0321) | 國立中央博物館·國立光州博物館, 앞의 책. |
0322) | 韓炳三·李健茂,≪南城里石棺墓≫(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0, 1977), 14쪽. |
0323) | 成周鐸,<大田地方出土 靑銅遺物>(≪百濟硏究≫5, 忠南大, 1974), 216쪽. |
0324) | 金廷鶴 編,≪韓國の考古學≫(河出書房新社, 1972), 도판 109. |
0325) | 朝中合同考古學發掘隊,≪崗上·樓上:1963∼1965 中國東北地方遺蹟發掘報告≫(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76쪽. |
0326) | 李健茂, 앞의 글(1992b), 166쪽. |
0327) | 平井尙志, 앞의 글. |
0328) | 靳楓毅,<大凌河流域出土的靑銅時代遺物>(≪文物≫11, 文物出版社, 1988), 30∼31쪽. |
0329) | 國立中央博物館·國立光州博物館, 앞의 책, 152쪽. |
0330) | 宇野隆夫,<多鈕鏡の硏究>(≪史林≫60-1, 史學硏究會, 1977), 90∼93쪽. |
0331) | 李健茂, 앞의 글(1992b). |
0332) | 韓炳三,<先史時代 農耕文靑銅器에 대하여>(≪考古美術≫112, 韓國美術史學會, 1971), 2∼13쪽. |
0333) | 東京國立博物館,≪寄贈 小倉コレクシヨン≫(便利堂, 1982), 9쪽. |
0334) | 沈陽故宮博物館 外, 앞의 글. |
0335) | 池健吉,<禮山 東西里石棺墓出土 靑銅一括遺物>(≪百濟硏究≫9, 1978), 157∼158쪽. |
0336) | 李健茂,<傳 益山出土 圓形有文靑銅器>(≪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通川文化社, 1984), 105∼127쪽. |
0337) | 李健茂, 위의 글, 114∼115쪽. |
0338) | 李健茂, 위의 글. |
0339) | 황기덕,<두만강유역과 동해안일대의 유적조사>(≪문화유산≫1957-6), 55쪽. |
0340) | 林炳泰, 앞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