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무문토기사회의 의식주생활
청동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계방식을 보여주는 각종의 고고학적 자료는 많지 않으며 또한 당시의 생계방식과 의식주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복원사례도 매우 드물다.
우선 고고학적인 증거로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으로는 쌀을 비롯한 보리·수수·기장·조·콩 등의 오곡을 재배하였으며, 개·돼지·소·말 등의 가축을 사육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반도 바깥의 요령지방을 위시한 북쪽지방에서는 상당 규모의 목축이나 유목을 시행하였으며, 또한 한반도 전역의 강변에 정착한 무문인들은 담수어로를 실시하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해양어로를 실시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의복 문제를 추적할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전무하다. 다만 실을 잣는 도구인 紡錐車가 주거지에서 필수품처럼 흔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들은 야생식물의 섬유질을 재료로 한 직조술로 베옷 따위의 의복을 지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복 문제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주거지에서 상당량의 각종 화살촉이 출토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화살촉들은 전투용으로 쓰이기도 하였거니와 상당수는 사냥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사냥용의 화살촉 가운데는 미늘이 없고 송곳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들도 있는데 이것들은 동물가죽의 손상을 줄이기 위하여 고안된 형태로 보인다. 따라서 일반 식물섬유로 직조된 의복과는 달리 보온과 강도와 신체보호 등의 면에서 장점을 지닌 동물가죽은 당시 중요한 의복재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이 살았던 주거지는 한반도의 도처에서 무수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주거지들은 취락생활의 결과 대부분이 무리지어 발견된다. 간혹 단독주거지가 발견되는 예도 없지 않으나 그러한 경우는 희소하며, 이 경우도 부분발굴의 결과이지 유적 전체를 발굴하면 반드시 그 주위에서 도 다른 주거지들이 발견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주거지군은 적게는 수 기에서 많게는 수백 기의 규모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주거지의 숫자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될 수 있는 주거지군의 규모는 대체로 취락이 입지하는 지형지리적인 형세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취락의 입지와 규모는 마치 요즈음의 농경취락의 입지 양상과 비슷하다. 즉 요즈음이나 또는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서해안지방과 같은 평야가 발달한 지대에서는 대규모의 농경부락이 존재하고 강원도 산간지대처럼 농경지가 협착하거거나 영동 동해안과 같이 농경 가능 지대가 협소한 지역에서는 자연히 그러한 지형에 적합한 형세와 규모의 취락이 형성되는 것처럼, 청동기시대의 취락의 규모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서행안지방의 경우 대동강유역의 평양시 남경유적0477)이나 충남 부여 송국리유적0478) 등과 같이 한 곳에서 수십 기 이상의 주거지가 발견되기도 하거니와, 강원도 양양의 포월리유적0479)처럼 십여 기가 군을 이룬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설령 몇 기나 수십 기가 발견된 경우라도 그것이 포함되는 전체 유적의 규모는 그 이상으로 컸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취락전체에 대한 발굴 사례가 드믄 우리 나라의 경우 현재까지의 조사로 나타난 유적의 규모만으로 그 취락이 규모를 추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의 취락구조와 주거모습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취락전체의 발굴사례가 증가함에 따라서 진전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주거지의 숫자로 잴 수 있는 취락의 규모는 취락이 입지하는 지형지리적인 형세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취락형성의 기본원리를 상기하면서 당시 취락의 형성과정과 그 패턴에 접근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취락에 대한 이해의 방편으로서 지석묘의 분포 양상을 들 수 있다. 주거지는 지하에 잠재하여 그 분포 양상을 알 수 없더라도 그들의 묘인 지석묘는 모두 지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분포의 파악이 용이하다. 이러한 지석묘들도 한두 기가 산재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적게는 수 기, 많게는 수백 기가 군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지석묘들이 특히 한반도의 서부지방에서는 수백 기나 수십 기 이상의 군을 이루고 있는 반면, 강원 산간지대나 영동 동해안지역에서는 겨우 수 기나 십여 기가 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지석묘와 무문토기 취락의 규모와 농경 취락생활 집단의 인구규모와 그 지형적인 입지 형세와의 연관이 있음을 반영한다.
즉 개간이 가능한 농경지가 넓으면 그만큼 농사의 규모는 확대되어 생산량이 늘면서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게 되고 사람수가 늘게됨으로써 더욱더 넓은 농경지의 개간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취락의 경우 당연히 취락 안에서 주민 전체의 생활편의를 위한 업무의 분담이 이루어지고 석기 제작장, 곡식 창고와 도구 보관창고, 일반인들의 생활 주거지, 마을의 공동 집회장소 등등의 공간 분화도 수반되었을 것이다.
무문토기인들은 집안에서 요리와 저장과 운반과 식기 등의 다양한 용도의 크고 작은 무문토기를 사용하면서 소가족 또는 대가족 규모의 가구별로 생활하였다. 아울러 집안에서는 조명과 보온과 조리용의 노지를 중심으로 하여 남녀별 또는 작업 내용별로 집내부의 세부 공간을 구분 사용하였을 것이다.0480)
무문인들은 겨울 동안에는 집안에서 저장해 놓은 곡식을 소비하면서 마제석기나 목제의 농기구들을 제작 비축하고, 집근처의 울타리에 가둔 가축을 돌보면서 생활하다가, 봄이 오면 마을 전체가 협동하여 경작하여 씨앗을 뿌리고 그 성장을 돌보면서 인근의 야산과 강에서 수렵과 담수어로를 병행하면서 살아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