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Ⅲ. 발해의 대외관계3. 일본과의 관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2. 발해의 발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2. 당과의 관계
        • 3. 일본과의 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2. 지방·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2) 경제구조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2. 유학과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2) 미술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발해와 일본의 신라협공계획과 양국교섭

 발해의 대일 사신파견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양국간의 접촉은 한동안 소원하였다. 이러한 소원한 관계를 깨뜨리고 두 나라가 적극적인 교섭을 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신라 공격계획이었다.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교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양국의 사신왕래는 모두 발해가 먼저 파견한 것이었다. 다만 일본은 발해 사신의 귀국 때 送使를 2차례 파견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신라를 협공하기 위한 그들 자신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발해의 제4차 대일 사신파견은 일본에 대한 답방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이른바 일본의「新羅征討計劃」(758?∼764)을237)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먼저 발해에 사신을 보냈다. 문왕 대흥 22년(758 ; 일본 天平寶字 2)에 양국간에 사신이 오고 갔다. 그 때 발해에 온 일본 사신은 과거 신라에 파견되어 신라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갔던 小野田守였다. 일본은 발해와 신라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그들의 신라정벌을 실천하려고 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太宰府에 명하여 行軍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장차 신라를 정벌하려는 것이다(≪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6월 임자).

② 배 500척을 北陸道의 여러 나라에서 89척, 山陰道의 여러 나라에서 145척, 山陽道의 여러 나라에서 161척, 南海道의 여러 나라에서 105척으로 나누어 한가한 달에 만들되, 3년 이내에 마치도록 하였는데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續日本紀≫권 22,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 9월 임오).

 위의 내용대로라면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 했던 것은 적어도 759년 이전이었다.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려 했던 758년부터 764년 사이의 발해와 일본간의 사신왕래는 매우 빈번하였다. 일본은 758년에 小野田守 등을 발해에 파견하였고 발해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같은 해 9월에 揚承慶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이듬해에도 일본이 高元度 등을 발해에 파견하자 발해는 高南申·高興福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760년에 일본이 고남신 등의 발해 사신을 전송하는 陽侯玲璆 등을 발해에 보내는 등 왕래가 계속되었다. 761년에도 일본은 高麗大山 등을 발해에 파견하였고 이에 대한 답방으로 발해는 문왕 대흥 26년(762)에 王新福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듬해에도 일본은 왕신복 등의 발해 사신을 전송하는 板振鎌束 등을 보냈다.238)

 이후 771년에 발해가 일본에 파견한 壹萬福·慕昌祿 등은 3년 뒤에 돌아왔다. 이처럼 양국간의 외교 재개는 발해가 먼저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이루어졌다.239)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횟수는 무왕 9년(727)부터 대인선 14년(919)까지 34차례였다. 그런데 발해가 먼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경우가 30차례였고, 나머지 4차례만 일본이 먼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었는데,240) 그 중 3차례가 바로 일본의 신라 정벌계획이 있었던 시기였다(758·759·761).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은 발해의 답방에 대하여 두 차례나 전송사신까지 파견하는 적극성을 보였다(760·763). 그러므로 758년에서 764년까지의 양국의 사신왕래는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발해를 신라정벌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발해에 대하여 적극 외교를 벌이게 되었던 또 다른 배경은 당에서 일어난 安史의 亂(758∼763)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 일본은 소야전수가 당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에 관하여 보고하자, 淳仁천황이 관계 朝臣들에게 그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하도록 명령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241) 그리고 759년 순인천황이 高元度를 迎入唐使로 삼아 당 長安에서 遣唐使 藤原河淸을 맞이하도록 하였다는 점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에 대한 소식은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고 난 이후에 얻은 부수적인 수확에 불과하였다.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이 당의 내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발해에 대한 사신 파견의 1차적 목적은 신라정벌을 위해 발해의 도움을 요청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는 발해에 보내는 사신으로 소야전수가 발탁되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경덕왕 12년(753)에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오만·무례하다고 하여 접견을 거부당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242) 이러한 전력을 가진 그를 발해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는 것은 일본이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당에 대한 관심 역시 신라를 의식한 외교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정벌에 당이 개입한다면 발해의 도움까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대발해관계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발해는 안사의 난 이후 요동지역 등 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영역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제안에 대하여 발해도 초기에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발해가 문왕 대흥 22년(758)과 23년에 군사전문가인 武官을 일본에 파견하여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신라 정벌계획에 관한 정보는 신라에도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는 경덕왕 21년 5월에 북쪽 변경지대에 五谷(황해도 瑞興)·鵂巖(鳳山)·漢城(載寧)·獐塞(遂安)·池城(海州)·德谷(谷山)의 6성을 쌓고 각각 太守를 두었는데,243) 이러한 조처는 곧 발해를 의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신라정벌을 계획하였던 것은 신라조정의 ‘無禮’가 명분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들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이전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시 일본은 신라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동방의 蝦夷문제 해결에 큰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2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정벌을 계획하였던 것은 바로 그들 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밖으로 전이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藤原仲麻呂는 권력을 독단하여 惠美押勝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반발세력이 커 정치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245) 혜미압승은 안으로 전제화를 추구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하여 신라정벌을 꾀하려 하였던 것이다. 혜미압승의 하이와 신라에 대한 군사적 모험은 둘 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었으나 특히 신라 정벌계획은 처음부터 정치적 애드벌룬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발해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려 하였다든지, 신라정벌에 대비하여 여러 곳에서 나누어 배를 건조하려고 하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애드벌룬 이상의 실천 가능성이 강한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하였던 것은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7)和田軍一,<淳仁朝に於ける新羅征討計劃について>(≪史學雜誌≫35­11, 1924).

鳥山喜一,<渤海王國と日本との交涉>(≪渤海史上の諸問題≫, 風間書房, 1968), 241∼253쪽.

石井正敏,<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新羅征討計劃との關連をめぐって->(≪史學論集 對外關係と政治文化≫1, 吉川弘文館, 1974).

酒寄雅志,<八世紀における日本外交と東アジア情勢-渤海との關係を中心として->(≪國史學≫103, 1977).

――――,<渤海國家の史的展開と政治文化>(≪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1979).

金恩淑,<8세기의 新羅와 日本의 關係>(≪國史館論叢≫29, 國史編纂委員會, 1991).

韓圭哲, 위의 책, 197∼211쪽.
238)金毓黻,<叢考>(≪渤海國志長編≫권 19).

王承禮 저, 宋基豪 역,≪발해의 역사≫(翰林大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178∼190쪽.
239)759∼771년까지의 관계기록은≪續日本紀≫권 31, 寶龜 2년 6월 27일·10월 14일·12월 21일 및 권 32, 寶龜 3년 정월 1일·정월 3일·정월 16일·정월 19일·정월 25일·2월 2일·2월 28일·2월 29일·9월 21일, 寶龜 4년 2월 20일·6월 12일·6월 24일·10월 13일.
240)물론 759년의 대발해 사신파견은 답방을 겸하고 있는 면도 있었으나 일본의 재차 파견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先派遣으로 간주하였다.
241)≪續日本紀≫권 21, 淳仁天皇 天平寶字 2년 12월 무신(10일).

鳥山喜一, 앞의 책, 241∼249쪽.
242)≪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2년.

≪續日本紀≫권 19, 孝謙天皇 天平勝寶 5년 2월.
243)≪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21년.
244)岸俊男,≪藤原仲麻呂≫(吉川弘文館, 1969), 261∼274쪽.
245)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野村忠夫,<奈良時代の政治過程>(≪岩波講座 日本歷史≫3), 95∼108쪽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