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도성
태조는 이 분지 서북부인 송악산 밑 滿月臺에 궁궐을 건립하고 이를 둘러싼 궁성과 그 밖의 황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성종대에서 현종대에 이르는 사이에 거란의 침입이 잦아 궁궐이 대파되는 등 피해가 커지자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여 현종이 처음으로 羅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현종 20년(1029)에 완공했고, 내성은 고려 말에 시작하여 조선 태조 2년(1393)에 완공되었다.
왕궁 유적은 1973년에서 1974년에 걸쳐 만월대 서북부에 있는 궁궐 유구 및 그 당시의 궁성과 황성의 유구들이 발굴 조사되었다.536) 이에 의하면 황성동벽은 廣化橋자리 동쪽에서 북으로부터 남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곧게 뻗었고,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북쪽과 중앙부에 門址가 있고, 남쪽에는 광화교자리 앞에 廣化門址가 있다. 황성의 남벽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직각으로 꺾어져서 남쪽 낮은 야산 위로 지나는데, 지금도 토성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 부분이 뒤에 축조된 나성 성벽과 겹쳐진다. 황성 정문인 朱雀門은 이 남벽 중앙부에 있는 朱雀峴에 있었다. 황성 서벽은 송악산 줄기의 한 능선을 따라 내려와서 訥里門에서 서남으로 뻗어 五(午)正門(옛 宣義門)에 이르며, 이 성벽은 뒤에 축조된 나성 성벽으로 이용되었다. 북벽은 야산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작은 골짜기를 막아 토성을 축조했으며, 지금도 비교적 잘 남아있다.
궁성은 궁궐을 둘러싸고 축조되었으며, 그 북벽은 황성 북벽에서 조금 떨어져서 지금은 그 성터만 남아있다. 궁정 서벽은 북벽으로부터 야산을 따라 서남쪽으로 토성이 뻗었으며, 廣明川을 가로질러 西華門址를 지나서 그 흔적이 없어졌다. 동벽은 麗正宮址에 일부 남아있고, 동쪽으로 출입하는 문의 기둥들과 계단이 남았으며, 여기서 남쪽으로는 흙담벽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궁성 남벽은 지금 그 터만 남았다.537)
나성은≪高麗史≫地理志 開城府條에 의하면 현종이 즉위하자 丁夫 304,400명을 징발하여 축조하기 시작하여 현종 20년(1029)에 완공되고, 성의 길이는 29,700보, 羅閣이 13,000칸, 대문 네 개를 포함하여 크고 작은 문이 25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부 238,938명, 工匠 8,450명, 성의 길이 10,660보로서, 성의 높이 27척, 두께 12척이며, 廊屋이 4,910칸이라고도 하여 이론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松都城內圖538)에 의하여 나성의 범위를 살펴보면 송악산에서 서쪽으로 都察峴을 지나 오송산·용수산을 거쳐 동쪽의 金峴 밖을 돌며 炭峴을 거쳐서 송악산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고려도경≫에는 성의 둘레가 60리이며, 작은 산을 돌며 지형에 따라 흙과 자갈로 쌓았으며, 성 밖에는 垓子가 없고, 성 위에는 성가퀴〔女墻〕가 없다고 하였다.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