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고려의 당악정재
송의 교방악사가 고려조정에 전한 대표적 음악문화의 하나가 바로 당악정재인데, 당악정재는 송의 교방악에 맞춰 공연되는 궁중무용의 총칭이다. 그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때는 조선 초기이고,≪고려사≫ 악지에서는 당악정재가 그냥 당악의 범주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사 서술에서 음악과 무용을 구별해야 편리하겠으므로 당악과 당악정재를 구별하였다.
문종 27년 2월 을해에 교방에서 여제자 진경 등 13명이 전한 踏沙行歌舞를 연등회에서 쓰기를 청했는데, 제문을 내려 그것에 따랐다. 그 해 11월 신해에 팔관회를 차리고 왕이 神鳳樓에 행차하여 악무를 관람했는데, 교방의 여제자 초영이 새로 전래한 抛毬樂과 九張機別伎를 공연했다. 포구락은 제자 13명에 의해서, 구장기는 제자 10명에 의하여 각각 공연되었다. 문종 31년 2월 을미 연등 때, 왕이 중광전에 임어하여 악무를 관람했는데, 교방의 여제자 초영이 王母隊歌舞를 공연했다. 이 가무는 1대가 55명이며, 춤으로 네 글자를 만드는데, ‘군왕만세’ 또는 ‘천하태평’이 된다(≪高麗史≫ 권 71, 志 25, 樂 2, 用俗樂節度).
교방의 여제자들에 의해서 공연된 답사행가무·포구락·구장기별기·왕모대가무는 모두 송의 교방악에 의한 당악정재들로 문종 27년과 31년 당시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공연되었다. 송의 교방악이 문종 이전에 고려조정에 소개되었음은 확실하지만, 처음 공연된 것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위에 나오는 당악정재 중에 오직 포구락만이≪고려사≫에 전하고 나머지 세 가지는 전하지 않으나, 송의 교방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0776)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정재는 獻仙桃·壽延長·五羊仙·抛毬樂·蓮花臺의 다섯 가지인데, 모두가 당악이라는 명칭 아래 기록되어 있다.0777) 이 중에서 포구락은 문종 27년에 팔관회에서, 연화대는 徐兢이 고려조정을 방문했던 인종 원년(1123)에 포구락과 함께, 또 헌선도는 의종 21년(1167)에 延興殿에서 각각 공연되었다.0778)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나머지 수연장과 오양선도 12세기 무렵에 이미 고려조정에서 공연되었을 것이다.
송나라 沈括의≪夢溪筆談≫에 의하면, 포구락은 李愼言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들이 춤추면서 포구문에 공을 던져 넣으면서 노는 일종의 놀이를 무용화한 정재이다.0779) 정월 보름날 군왕의 進酒를 축송하는 내용의 정재가 수연장이고, 일명 石枝舞라는 연화대는 당나라 때 지금의 이란 북쪽인 서역의 石國에서 유래되었다.0780) 군왕을 송수하는 내용의 오양선과 헌선도는 王母와 여기들이 추는 정재인데, 조선 후기까지 공연되었으나 현재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이러한 당악정재의 공연 때 연주된 반주음악은 물론 당악이었다. 당악정재의 반주음악은 정재에 따라서 곡명이 서로 달랐다. 헌선도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보면, 반주음악은 會八仙引子·獻天壽慢·獻天壽令·金盞子慢·金盞子令·瑞鷓鴣慢·瑞鷓鴣嗺子慢·千年萬歲引子·會八仙引子 등이 차례로 연주되었다.0781) 연화대·수연장 등과 같은 당악정재의 반주음악도 곡명이 서로 달랐음은 물론이다. 당악정재는 당악의 전승에 중요한 구실을 담당했으므로, 음악사적 관점에서 중요하다.
고려조정의 당악정재는 향악정재에 비해서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다.0782) 첫째는 긴 장대 위에 수술로 장식한 죽간자를 든 여기가 무대로 무용수들을 이끌고 나오는 점이고, 둘째로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노래부르는 致語와 口號가 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 공연 도중에 노래로 부르는 唱詞의 가사가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치어와 구호 그리고 창사의 내용은 정재에 따라서 서로 달랐다.
비록 당악정재가 송나라의 교방악에서 유래되었지만, 고려의 왕립음악기관에서 새로운 음악문화로 수용함으로써 고려시대의 당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당악정재는 향악정재의 형성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고, 고려의 당악정재는 조선의 당악 발전에 터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