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민간의료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의원이 행하는 침구와 약물치료 이외에 민간요법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은 한증욕·온천욕 등 의 목욕치료법을 비롯하여 확실한 효과가 있는 민간의 비방 및 효력이 뛰어 난 약수 등이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그 중 전술한 한증요법은 주로 한성에 서 행하던 것이었고, 온천욕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35개소의 온천681)을 이용한 물리요법이었다. 이러한 온천치료법은 삼국시대부터 있던 것이지만, 조 선 초에 적극 개발하여 온천을 발견한 자는 포상하고 관원은 超授하였으며, 관리하는 고충때문에 이를 숨기는 자는 처벌하는 등 온천개발에 노력하였 으며 한편 온천에서 병을 치료하는 자를 위한 시설도 마련하였다.
즉 세종 9년(1427) 9월 예조의 건의에 따라 溫井 부근의 한량인과 승려 중 적당한 자를 골라서 監考를 삼아 온정수리와 병자구호를 관장케 하고, 각 온정에는 보를 세워 그 이식으로 병자에게 米豆를 공급하되 이를 감고와 색 장이 전장하며, 사용하는 그릇은 관물을 공급하고 寶米의 관리와 병자 구호 는 수령이 늘 고찰하되, 立寶米豆는 200석을 넘지 않게 하였다.682) 이에 따 라 각 온천은 이러한 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나 여기에는 의원이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기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방민의 질병치료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의 또 다른 민간요법도 많이 있었는데 문종 때 평안토인 金於郎의 蠱毒治療法은 매우 효과가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를 전국에 알려 누구나 치료할 수 있게 하였으며683) 淸州의 椒水, 殷栗의 醎泉, 雲山의 약수 등도 민간 요법으로 각종 질병의 치료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약재를 목욕물에 혼용하여 목욕하는 藥浴도 많이 이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의료기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이를 더욱·확대 정비함으로써 백성에 대한 의료시혜의 폭을 더욱 넓혔던 것이다. 특히 활인원의 기능은 고려시대보다 더욱 다양해져 도성내의 병자를 치료함으로써, 국립 의료기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여러 의료기구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 소임을 다하고 자 노력했던 것은, 역대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지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특히 세종은 민간의 질병 구료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를 마련함은 물론, 기존 기구의 운영에 적극성을 보임으로써 조선 초기의 의료제도의 기틀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孫弘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