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Ⅰ. 학문의 발전3. 역사학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1) 전대사의 체계화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1. 성리학의 보급
          • 1) 성리학의 역할
          • 2) 5례·4례의 정비
          • 3) 문묘제도의 정비
          • 4) 대표적인 성리학자들
        • 2. 훈민정음의 창제
          • 2) 훈민정음의 창제
          • 5)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
          • 6) 훈민정음과 관련된 사업들
        • 3. 역사학
          • 1) 민족사의 체계화와 전대사의 정리
            • (1) 전대사의 체계화
            • (2) 고려시대사의 정리
            • (3) 전대사의 체계적 정리
          • 2) 춘추관과 당대사의 편찬
            • (2) 춘추관과 사관
            • (3) 실록의 편찬과 보관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1) 지리지의 편찬
          • 2) 국내지도의 제작
            • (3) 조선방역도
          • 3) 세계지도의 제작
            • (1)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
            • (2)≪해동제국기≫의 일본 및 유구국지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2) 자연신
        • 2. 불교
          • 1) 억불정책과 교단의 존폐
            • (1) 억불정책의 전개
            • (2) 양종과 승과의 폐지
          • 2) 도첩제와 부역승
            • (1) 도첩제의 강화와 폐지
          • 3) 왕실의 불교숭신과 불교행사
            • (1) 숭불의 왕과 그 불사
          • 4) 민간의 불교신앙
            • (3) 불탄일 연등과 수륙재
          • 5) 사찰재산과 승려의 경제활동
          • 6) 당시의 고승들
            • (1) 자초와 기화
            • (2) 세종대의 명승들
            • (3) 세조대의 고승들
        • 3. 도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가. 단군조선·기자조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신흥사대부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숭배를 제도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九月山 三聖祠 숭배에서 평양의 단군사당 건립을 통한 立祠致祭의 과정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이성계가 즉위한 다음달 새 왕조의 제례문제를 논의하면서 趙璞은 단군과 기자를 각각 ‘東方始受命之主’와 ‘始興敎化之君’으로서 평양부에서 時祭할 것을 건의하였다.168) 그리고 태종 12년(1412)에는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하도록 하였다.169) 비록 명과의 대외관계로 인해 단군보다 기자에 대한 숭신이 높았지만, 국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숭배의 비중도 차츰 높아가고 있었다.170)

 한편 鄭陟은 세종 7년(1425)에 단군사당을 따로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171) 즉 단군은 唐堯와 같은 때에 즉위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했던데 반해, 기자는 周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책봉되었고, 제왕의 歷年에서도 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南面坐北을 하고 단군이 配東하고 있음은 ‘立國傳世之先後’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 후 세종 11년 단군사당을 따로 짓고 동명왕을 합사하여 함께 제사지냈다.172) 그리고 세종 12년 신위에도 箕子殿의 신위는 그때까지 ‘朝鮮侯’였던 것을 ‘後朝鮮始祖箕子’로 고치고, 단군의 신위는 ‘朝鮮侯檀君’이던 것을 ‘朝鮮檀君’으로 고쳐「侯」자를 삭제하였다.173) 이로써 단군은 국가적인 공인 속에 개국시조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단군을 민족적인 개국시조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국가의 제사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단군이 구월산 三聖祠에서의 3성의 하나인 신화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실재하였던 조선의 개국시조로 이해되는 것과 결부하여, 단군이 1,048년을 살았다는 기록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단군왕조의 역년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이러한 단군이해와 짝하여 개국인물을 숭배했는데, 檀君·箕子·東明王 외에도 다른 개국시조에 대한 치제가 이루어졌고, 고려왕조에서처럼 역대시조를 모두 존중하여 숭배함으로써 예치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려 하였다.174)

 이러한 단군숭배과정을 보면 민족국가의 역사적 독립성과 자주성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후」명칭의 삭제, 조선의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의 확정, 그리고 단군사당을 기자묘에서 분리시킨 일 등은 우리 나라가 중국의 分封地가 아니므로 祭天을 할 수 있다는 제천론 주장175)과 함께 나라의 독립성을 내외에 과시하는 상적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단군숭배는 우리 민족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하는 자부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여 민족사의 상한을 소급시키고, 단군조선은 1,000여년을 유지해온 왕조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기자를 상한으로 설정하였던 것과 달리 독립적인 민족시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과 동등한 역사편년을 가진 국가로 인식하여 대외적인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개국시조로서의 단군숭배는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사상조류에 따라 ‘교화지군’으로서의 기자숭배가 적극화되면서도 이후 우리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숭배 신앙을 가져오는 토대를 쌓아 조선 후기의 단군인식의 기초를 이루었다.

 조선에서의 기자숭배는 기자 이전에 존재하였던 단군의 개국시조로서의 확립과정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즉 後朝鮮國의 건국과 기자를 결부시킴으로써 기자는 이전의 막연한 교화지군의 위치에서 정치적인 실존체로서의 후조선 시조176)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東國史略≫·≪東國世年歌≫·≪應製詩註≫·≪三國史節要≫·≪東國通鑑≫등을 보면, 기자는 단군이 入神한 후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졌으며,「仁賢之化」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관찬 지리서인≪世宗實錄地理志≫와≪東國與地勝覽≫에서도 이러한 내용으로 통일되었다.177) 그리고 이를 통해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의심할 바 없이 받아들여지고, 기자조선은 높은 수준의 문화국가로 이해되어졌다.

 기자숭배는 당시 중세적인 문화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중화문명에 대한 존숭과 결부되어 있다. 기자조선은 천자의 분봉을 받은 최초의 제후 국가이며, 우리 나라가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다시 잇는다는 것이다.178) 이는 조선 개국과 함께 그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자조선을 이은 조선은 중국의 분봉을 받은 가장 합법적 정부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자숭배는 동시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동질성의 강조와 결부되어 있다. 유교국가의 개국을 이상화하였던 초기 신흥사대부들에게는 중화문명의 최고의 정치철학인「洪範」에 의한 기자조선의 문명화는 바로 당시 중세보편문화의 표준으로 이해되었던 중화문화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또 불교국가인 고려를 청산하고 유교국가인 조선을 건국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자조선의 뒤를 이어 당시 선진적인 중화문명에로의 일보 전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후조선 시조로서의「仁賢之化」를 달성한 측면과 사대관계의 상징으로서의 조선 초기의 기자상도 16세기 사림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시기에 이르면 의리와 명분을 존중하는 시대분위기에 따라 변화한다. 기자는 왕도이념과 도학정치의 지주로서 새롭게 인식되어 사상적인 차원에서 인식이 심화되었다.179)

 조선은 당시의 대외적인 관계로 인해 기자묘를 세워 대명사대를 표방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단군을「受命之主」라 하여 우리 민족의 시조임을 내세웠다. 이는 조선 초기의 제천논의와 함께 민족의 유구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여 신생 조선이 그러한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임을 강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6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169)≪太祖實錄≫권 23, 태조 12년 6월 기미·7월 경자.
170) 조선 전기의 단군숭배에 대하여는 姜萬吉,<李朝時代의 檀君崇拜>(≪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249∼274쪽 및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歷史學報≫58, 1973), 126∼134쪽 참조.
171)≪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신유.
172)≪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平壤府 檀君祠.
173)≪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174)≪經國大典≫권 3, 禮典 致祭 中祠.
175)≪世宗實錄≫권 1, 세종 원년 6월 경신. 조선 전기의 제천논의에 대하여는 金泰永, 앞의 글, 109∼118쪽 및 韓永愚,≪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知識産業社, 1983), 32∼37쪽 참조.
176) 세종 12년 8월 기자의 위패가 “後朝鮮始祖箕子”로 바뀌어 제후의 위치에서 정치적인 시조로 그 위치가 격상되었다(≪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177) 朴光用,<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論≫6, 서울大 國史學科, 1980), 259쪽.
178) 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國號.
179) 韓永愚,<高麗∼朝鮮前期의 箕子認識>(≪韓國文化≫3, 1982;≪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知識産業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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