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단군조선·기자조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신흥사대부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숭배를 제도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九月山 三聖祠 숭배에서 평양의 단군사당 건립을 통한 立祠致祭의 과정으로 나타났다. 이는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이성계가 즉위한 다음달 새 왕조의 제례문제를 논의하면서 趙璞은 단군과 기자를 각각 ‘東方始受命之主’와 ‘始興敎化之君’으로서 평양부에서 時祭할 것을 건의하였다.168) 그리고 태종 12년(1412)에는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하도록 하였다.169) 비록 명과의 대외관계로 인해 단군보다 기자에 대한 숭신이 높았지만, 국조로서의 단군에 대한 숭배의 비중도 차츰 높아가고 있었다.170)
한편 鄭陟은 세종 7년(1425)에 단군사당을 따로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171) 즉 단군은 唐堯와 같은 때에 즉위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했던데 반해, 기자는 周武王의 명을 받아 조선에 책봉되었고, 제왕의 歷年에서도 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자가 南面坐北을 하고 단군이 配東하고 있음은 ‘立國傳世之先後’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 후 세종 11년 단군사당을 따로 짓고 동명왕을 합사하여 함께 제사지냈다.172) 그리고 세종 12년 신위에도 箕子殿의 신위는 그때까지 ‘朝鮮侯’였던 것을 ‘後朝鮮始祖箕子’로 고치고, 단군의 신위는 ‘朝鮮侯檀君’이던 것을 ‘朝鮮檀君’으로 고쳐「侯」자를 삭제하였다.173) 이로써 단군은 국가적인 공인 속에 개국시조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단군을 민족적인 개국시조의 차원으로 이해하여 국가의 제사 대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단군이 구월산 三聖祠에서의 3성의 하나인 신화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실재하였던 조선의 개국시조로 이해되는 것과 결부하여, 단군이 1,048년을 살았다는 기록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 단군왕조의 역년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이러한 단군이해와 짝하여 개국인물을 숭배했는데, 檀君·箕子·東明王 외에도 다른 개국시조에 대한 치제가 이루어졌고, 고려왕조에서처럼 역대시조를 모두 존중하여 숭배함으로써 예치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여주려 하였다.174)
이러한 단군숭배과정을 보면 민족국가의 역사적 독립성과 자주성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후」명칭의 삭제, 조선의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의 확정, 그리고 단군사당을 기자묘에서 분리시킨 일 등은 우리 나라가 중국의 分封地가 아니므로 祭天을 할 수 있다는 제천론 주장175)과 함께 나라의 독립성을 내외에 과시하는 상적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러한 단군숭배는 우리 민족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하는 자부심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여 민족사의 상한을 소급시키고, 단군조선은 1,000여년을 유지해온 왕조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기자를 상한으로 설정하였던 것과 달리 독립적인 민족시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중국과 동등한 역사편년을 가진 국가로 인식하여 대외적인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개국시조로서의 단군숭배는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사상조류에 따라 ‘교화지군’으로서의 기자숭배가 적극화되면서도 이후 우리 민족시조로서의 단군숭배 신앙을 가져오는 토대를 쌓아 조선 후기의 단군인식의 기초를 이루었다.
조선에서의 기자숭배는 기자 이전에 존재하였던 단군의 개국시조로서의 확립과정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즉 後朝鮮國의 건국과 기자를 결부시킴으로써 기자는 이전의 막연한 교화지군의 위치에서 정치적인 실존체로서의 후조선 시조176)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東國史略≫·≪東國世年歌≫·≪應製詩註≫·≪三國史節要≫·≪東國通鑑≫등을 보면, 기자는 단군이 入神한 후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졌으며,「仁賢之化」가 있었다는 내용으로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관찬 지리서인≪世宗實錄地理志≫와≪東國與地勝覽≫에서도 이러한 내용으로 통일되었다.177) 그리고 이를 통해 기자조선의 실재성이 의심할 바 없이 받아들여지고, 기자조선은 높은 수준의 문화국가로 이해되어졌다.
기자숭배는 당시 중세적인 문화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중화문명에 대한 존숭과 결부되어 있다. 기자조선은 천자의 분봉을 받은 최초의 제후 국가이며, 우리 나라가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다시 잇는다는 것이다.178) 이는 조선 개국과 함께 그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자조선을 이은 조선은 중국의 분봉을 받은 가장 합법적 정부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자숭배는 동시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동질성의 강조와 결부되어 있다. 유교국가의 개국을 이상화하였던 초기 신흥사대부들에게는 중화문명의 최고의 정치철학인「洪範」에 의한 기자조선의 문명화는 바로 당시 중세보편문화의 표준으로 이해되었던 중화문화로의 이행을 의미하였다. 또 불교국가인 고려를 청산하고 유교국가인 조선을 건국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자조선의 뒤를 이어 당시 선진적인 중화문명에로의 일보 전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후조선 시조로서의「仁賢之化」를 달성한 측면과 사대관계의 상징으로서의 조선 초기의 기자상도 16세기 사림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시기에 이르면 의리와 명분을 존중하는 시대분위기에 따라 변화한다. 기자는 왕도이념과 도학정치의 지주로서 새롭게 인식되어 사상적인 차원에서 인식이 심화되었다.179)
조선은 당시의 대외적인 관계로 인해 기자묘를 세워 대명사대를 표방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단군을「受命之主」라 하여 우리 민족의 시조임을 내세웠다. 이는 조선 초기의 제천논의와 함께 민족의 유구성과 독립성을 강조하여 신생 조선이 그러한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임을 강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68) | ≪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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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 ≪太祖實錄≫권 23, 태조 12년 6월 기미·7월 경자. |
170) | 조선 전기의 단군숭배에 대하여는 姜萬吉,<李朝時代의 檀君崇拜>(≪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新丘文化社, 1969), 249∼274쪽 및 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歷史學報≫58, 1973), 126∼134쪽 참조. |
171) | ≪世宗實錄≫권 29, 세종 7년 9월 신유. |
172) | ≪世宗實錄地理志≫권 154, 平安道, 平壤府 檀君祠. |
173) | ≪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
174) | ≪經國大典≫권 3, 禮典 致祭 中祠. |
175) | ≪世宗實錄≫권 1, 세종 원년 6월 경신. 조선 전기의 제천논의에 대하여는 金泰永, 앞의 글, 109∼118쪽 및 韓永愚,≪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知識産業社, 1983), 32∼37쪽 참조. |
176) | 세종 12년 8월 기자의 위패가 “後朝鮮始祖箕子”로 바뀌어 제후의 위치에서 정치적인 시조로 그 위치가 격상되었다(≪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
177) | 朴光用,<箕子朝鮮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論≫6, 서울大 國史學科, 1980), 259쪽. |
178) | 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國號. |
179) | 韓永愚,<高麗∼朝鮮前期의 箕子認識>(≪韓國文化≫3, 1982;≪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知識産業社, 19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