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동국사략≫의 편찬과 그 성격
태조 4년(1395)≪高麗國史≫의 수찬을 완료한 후 고려 이전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체계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태종 2년(1402) 삼국사를 재정리하여 이를≪고려국사≫에 연결시키려는 것이≪東國史略≫의 수찬동기라 할 수 있다.180) 태종 2년 6월 河崙·權近·李詹에게 삼국사를 수찬토록 명하였는데,181) 이들로 하여금 분찬하려고 한 것 같다. 그 해 10월초 하륜과 이첨이 賀登極使로 명에 갔다가 다음해 5월 귀국하였는데, 그 동안에도 권근의 주도로 편찬이 이루어져, 태종 3년 8월≪동국사략≫이라는 이름으로 바쳐졌다. 이첨이 쓴 사론 3편182)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론과 서문 및 전문을 권근이 작성하였으므로 흔히 권근의 受命撰으로 불린다. 그리고 그 명칭은 원래≪三國史略≫으로 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183)
≪三國史記≫가 單代史인데 반하여≪동국사략≫은 단군조선 이래의 상고사를 삼국사에 첨보하여,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과 삼한-삼국의 순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다. 상고사의 내용은≪三國遺事≫의 내용을 많은 부분에서 수용하였다. 특히 삼한의 위치는≪唐書≫에 따라 마한을 백제, 변한을 고구려, 진한을 신라에 비정하였으며,184) 이 설은 그 뒤≪東國通鑑≫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기의 거의 모든 역사서술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비록 상고사가 정연하게 체계화되지는 않았으나,≪동국통감≫이≪동국사략≫의 단선적인 이해를 거의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후 前代史의 체계적인 정리를 先鞭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서이다.
권근은 삼국사를 재정리할 필요성에서,≪삼국사기≫가 기전체로 편찬되고 50권으로 이루어져 그 내용이 중복되었다고 하여 10여 권의 편년체로 줄였다. 이것은 기록의 전승보다는 교훈을 주는 역사서로서의 편년체의 장점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이 이미 한나라 한국민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현재적인 입장에서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묶어 하나의 역사로 다루면서 신라를 위주로 하여 신라의 年紀 밑에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서술하였다. 이러한 신라중심적인 역사서술은≪三國史節要≫와≪동국통감≫에서 삼국을 동등한 입장에서 서술하는 방식으로 수정되어 갔지만, 편년체를 통해 전대사를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선편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화 작업은 당시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의 새 왕조 건설에 따르는 국가적 통치이념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또 朱子의「綱目法」에 따라 사건의 줄거리를 먼저 서술한 다음 작은 글씨로 서술하는 강목체 역사서술의 효시를 이루었다.185)
서술내용에 있어서 方言과 俚語를 완전히 고치지 못한 데에 대한 유교학자로서의 비판의식, 그리고 고대적인 습속의 잔재를 청산하고 불교·도교적인 이단을 배제하여 유교윤리의 사회로 변혁하려는 생각이 그 중점을 이루었다.186) 신라의 고유 왕호나 여왕·태후·태자의 칭호도 제후의 명분에 맞지 않다고 하여 용어를 유교적 관점에서 개서하였다. 연기표기에서도 卽位年稱元法을 踰年稱元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사론을 통해 예절·의식 등의 사회윤리를 유교화하려고 하였으며 유교윤리에 의해 인물을 포폄하였다. 또 신화나 전설을 삭제하고, 강상의 윤리에 어긋나는 사건은 신랄하게 비판하였다.187)
≪동국사략≫은 사료적인 면에서는≪삼국사기≫만을 축약하였으므로 원전적인 가치는 별로 없으나, 조선시대 삼국사 정리의 선구적인 작업으로서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즉 후일 편찬되는≪삼국사절요≫와≪동국통감≫에 널리 인용되어 조선왕조의 새로운 역사서술 방식과 역사서술 태도의 정립을 이룬 초기의 대표적 사서의 하나이다.
한편≪동국사략≫은 요통정벌운동과 왕자의 난의 과정에서 鄭道傳 등의 개국공신 실권파를 제거한 태종과 비혁명파인 권근의 주도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이≪동국사략≫편찬의 성격에 대하여서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표명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려던 것으로 이해하여, 정도전의≪고려국사≫와는 대립되는 역사서술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188)
180) | 鄭求福,<東國史略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歷史學報≫68, 1975) 참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권근 찬의≪동국사략≫이 전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다만 고려대학교 華山文庫에 권 3∼4의 2권 1책만이 零本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은 영인본으로 간행된≪韓國史書叢刊≫1(驪江出版社, 1986)에 수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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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 ≪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6월 경신. |
182) | 鄭求福,<雙梅堂 李詹의 역사서술>(≪東亞硏究≫17, 1989), 304∼305쪽. |
183) | ≪陽村集≫과≪東文選≫에는 權近이 쓴 서문이 있는 바, 그곳에도<三國史略序>와<進三國史略箋>으로 기록되어 있음에서 알 수 있다. |
184) | 韓永愚,≪朝鮮前期史學史硏究≫(서울大 出版部, 1981), 26∼29쪽. |
185) | 鄭求福, 앞의 글(1975), 15∼20쪽. |
186) | 鄭求福, 앞의 글, 7∼12·22∼49쪽. |
187) | 鄭求福, 위의 글, 19∼22쪽. |
188) | 韓永愚, 앞의 책(1981), 25∼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