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동국세년가≫와≪응제시주≫의 편찬과 성격
正史 이외에 시가의 형식으로 역사를 운문화한 詠史詩가 있다. 특히 조선 전기에 전대사를 체계화하는 형태로 나타난 대표적인 영사시로≪東國世年歌≫가 있다.
세종 18년(1436) 왕명으로 尹淮와 權踶가≪歷代世年歌≫를 편찬하였다. 이책은 상책의≪역대세년가≫와 하책의≪동국세년가≫로 구성되어 있다. 상책은 원나라 초기의 문인인 曾先之가 노래한≪역대세년가≫에 윤회가 주석을 붙이고, 원대 부분은 張美和의 시로 보충하였는데, 이는 천지의 개창에서 원대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하책은 단군에서 고려말에 이르는 우리 나라 전역사를 체계화하여 노래하고 있다.189) 李季甸의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은 초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편찬한 것이다.190) 따라서≪동국세년가≫는 중국의 역사를 다룬≪역대세년가≫와 함께 동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동국세년가≫는 먼저 이승휴의≪제왕운기≫에 의거하여 우리 나라가 지리적으로 중국에서 독립된 나라임을 설명하였다. 이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개괄하였다. 단군조선에 대해서는 단군의 개국이 요와 동시라는 것과 享國의 歷年이 1,048년, 단군묘가 아사달에 있다는 것을 서술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것, 그리고 기자의 유풍과 유속이 당시 조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서술하여 독립성과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위만조선-四郡二府-삼한-삼국의 순으로 고대사의 체계를 서술하였다. 그리고 삼국은 신라-고구려-백제의 순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삼국에 이어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소개하고, 이어 고려 역대왕들의 승습관계와 치적을 적었다.
이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전역사를 체계화한 조선시대 최초의 영사시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나라는 만리의 옛 대국으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라는 자부심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시가형식이나마 이러한 통사가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 이래의 단군과 기자에 대한 관심과≪동국사략≫과 같은 삼국사에 대한 체계화작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영사시인≪제왕운기≫가 주로 창업주의 활동을 들어낸 데 비하여,≪동국세년가≫는 왕위의 계승에 역점을 두고 있으나,191) 우리 나라의 강역을 중국의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두 영사시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應製詩註≫는 權擥이 자신의 조부인 권근이 지은≪應製詩≫에 대해 주석을 붙인 것이다.192) 즉 권근이 태조 5년(1396) 表箋文事件으로 명에 갔을 때, 명 황제가 내준 시제에 따라 지은 24편이 시와 명 황제 자신이 지어 권근에게 준 3편의 시에 대하여 권람이 주석을 붙였던 것이다. 비록 시에 대한 단편적인 주석에 그쳐 체계적인 사서의 형식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시조인 단군에서부터 이성계의 건국설화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정리하고 있어, 이 역시 전대사에 대한 이해였다고 할 수 있다.
≪응제시주≫에는 민족시조나 개국시조에 대한 설화는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신화와 전설은 대부분≪삼국유사≫·≪동명왕편≫·≪제왕운기≫·≪고려사≫·≪용비어천가≫등에서 뽑은 것이지만 전혀 새로운 자료에서 뽑은 것도 있다.≪응제시주≫의 역사부분에 대한 주석에서는 단군에 대한 인식이 보다 깊어지고 있고, 한4군의 위치에 대해서 낙랑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고, 현도는 만주 심양부근에, 진번은 요동지방으로 비정하여 한4군 중 3개군을 만주에 비정하였다. 그리고 요동은 기자의 분봉지로 기자조선 이후 우리의 영토가 되었으며, 고구려시대에 다시 우리의 강역으로 속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성립과 한양천도가 이미 참서 등에 예시되었음을 들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193)
이러한 역사이해는 비록 전대사를 완벽하게 체계화하여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명멸한 많은 나라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이해하여 이후 역사지리 연구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으며, 노래를 통해 이를 널리 보급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