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려국사≫의 편찬과 성격
조선이 건국된 뒤 3개월 만인 태조 원년(1392) 10월에 조준·정도전·정총·朴宜中·尹紹宗이 왕명을 받아 편찬을 시작하여197) 동왕 4년 정우러 정도전·정총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된 37권의≪고려국사≫가 찬진되었다.198) 그러나 태종 14년(1414) 5월 고려 말기의 기사 가운데 태조에 대한 기록이 충실하지 못한 사실이 지적되어,199) 같은 해 8월에 공민왕 이후의 고려사를 개찬하기 시작하였다.200) 그런데 당시 정총이 쓴<高麗國史序>가≪東文選≫에 남아 있고, 정도전이 이를 왕에게 바칠 때 쓴<進高麗國史箋>과 태조가 정도전·정총을 포상하는 글이≪태조실록≫에 실려 있어 편찬체재 및 편찬원칙 등을 유추할 수 있으며, 정도전과 정총이 쓴 사론이≪고려사절요≫에 전하고 있어 그들의 사학사상도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다.
정총의<고려국사서>에 나타난≪고려국사≫의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원종 이전의 사실로 참의한 것은 개서한다. 조회나 제사는 상례적인 행사이므로 지내지 않았거나 왕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에만 기록한다. 재상의 임명은 그 직임이 중대하므로 기록한다. 과거로 선비를 뽑았던 사실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기록한다. 대간의 복합은 그 내용이 전하지 않더라도 기록한다. 上國의 사신이 왕래한 사실은 반드시 기록한다. 災異와 水旱은 작아도 기록한다. 왕의 사냥과 연회는 반드시 기록하여 게으르게 노는 것을 경계한다는 등이었다.201) 이러한 편찬원칙에서 후대의 군주들에게 정치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원종 이전의 사실로 참의한 것은 개서한다는 원칙은 원종 이전의「宗」이라 칭한 왕의 묘호를「王」으로 고치고,「節日」은「生日」,「詔」는「敎」,「朕」은「予」로 낮추어 쓴다는 것으로, 여기에서 찬자들의 유교적이며 명분적인 성향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원나라 간섭 이후 고려의 국사편찬의 성향을 계승한 것으로 당시 편찬자들의 주체의식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국사≫에 실렸던 사론은≪고려사절요≫에 ‘史臣曰’로 인용되어 57편이 전하고 있다. 이 중 역대 왕에 대한 평가인 贊은 정도전의≪經濟文鑑≫에 있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 많으므로, 이 부분은 정도전이 쓴 것으로 생각되며, 57편의 사론 중에는 정도전과 함께 당시 편찬의 중심인물인 정총이 쓴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론에는 고려왕조를 비판하고 무신정권을 비판하는 문신중심적 경향을 보이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윤리와 사대외교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고 있어 조선 초기 사대들의 성리학적 사상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군주의 어진 정치와 덕스러운 정치가 강조되었고, 재상과 대간의 직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왕도정치와 재상중심의 정치를 강조하였다.202)
이 책의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高麗實錄≫, 이제현의≪史略≫, 李仁復·李穡의≪金鏡錄≫, 민지의≪編年綱目≫, 고려 말기 사관들이 써놓은 史草들이었다. 그러나≪고려실록≫은 충실하게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 내용이 소략하고 인물평가가 공평하지 못하며, 내용을 잘못 기술한 곳이 있고, 역사기술에 과거에 썼던 칭호를 개서한 점, 조선건국을 조선 태조 중심으로 서술하지 않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등 사대부의 역할이 너무 강조되었던 점 등이 문제가 되어 개수되었다. 이 밖에도 태종이나 태종대 재상의 자리에 오른 하륜의 정도전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개찬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사학사적으로 볼 때, 이는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새 왕조의 임무를 수행하여 고려시대 전체의 역사를 완성한 첫 사서였다. 그리고≪고려국사≫에는 고려멸망의 당위성과 조선건국의 합리화를 시도한 특징과 통치이념을 정립하려는 수찬자의 목적의식이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203) 또 무엇보다도 이 책은 이후 고려사 편찬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었으며,≪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