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수교고려사≫
세종은 즉위할 때부터 부왕이 관심을 가졌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한 고려사의 개수작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즉위년(1418) 12월에≪고려국사≫는 없는 것만 못하다고 비판하였으며204) 다음해인 원년 9월에 유관과 변계량으로 하여금 고려사를 개수하도록 하였다.205) 이에 세종 3년 정월 30일 개수된 고려사가 왕에게 상진되었다. 이 때의 개수목적은 사신의 사초에 다르게 기록된 사실을 바로 잡고, 정도전이 다 고치지 못한 참월한 용어를 변개하는데 있었다.206) 편찬체재나 용어의 변개에는 변계량의 주장이 크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세종 5년 12월 젊은 사관인 李先齊·梁鳳來·鄭賜·康愼·裵寅·金張 등에 의해 당시의 관제와 칭호를 변개하여 그 實을 없애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었던 바, 세종은 변계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관과 윤회에게 명하여 변개된 참월한 명칭을 당시 원상태로 직서하여 사실을 보존하도록 하였다.207) 이 개수작업은 세종 6년 8월에≪讐校高麗史≫로 완성되었다.208) 그리고 세종은 윤회에게 명하여 정총이 쓴≪고려국사≫의 서문도 고치도록 하였다.209) 이에서 보듯이 유관과 윤회의 개수잡업은 변계량이 개칭한 참월한 명칭의 개칭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수교고려사≫도 반포되지 못하였다. 세종 7년 12월 변계량의 강력한 반대와 이를 지지한 卓愼의 주장으로≪수교고려사≫에 윤회의 서문을 붙이는 것이 보류되었다.210)
≪수교고려사≫는 세종의 명을 받고 상진되기까지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변계량이 개칭한 용어를 직서하는데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참월한 명칭의 직서문제가 일단≪수교고려사≫를 통하여 해결되었으며, 이후 직서주의는 권제의≪高麗史全文≫을 거쳐≪고려사≫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