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는 기전체≪고려사≫가 편찬된 직후, 이전의 편년체 고려사의 전통을 이어 고려왕조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하여 찬진되었다. 편년체의 역사 편찬을 시도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고려사≫편찬과정에서 편년체의 사서들이 계속 개찬되어 왔으므로 그 편찬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기전체의 역사가 읽기에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읽히기 위한 역사로서 편년체의 역사편찬이 필요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문종 원년(1451) 8월에≪고려사≫편찬이 완료되어 왕에게 바치는 자리에서, 김종서는 기전체의≪고려사≫는 열람하기 불편하니 새로이 편년체의 사서를 편찬할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전 작업의 축적으로 개찬작업이 그다지 어렵지 않아≪고려사≫가 편찬된 지 5개월 만인 문종 2년에 총 35권으로 이루어진≪고려사절요≫가 김종서 등에 의하여 찬진되었다.245) 그리고≪고려사절요≫는 편찬이 완료된 다음해인 단종 원년(1453) 4월에 甲寅字로 간인되었는데,246) 이 때 찍은 책은 35권 35책으로 장정되었다. 몇 질이 인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54질을 집현전에 보관하였고,247) 네 곳의 史庫와 문헌관계의 관청과 관료에게 배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종 원년 4월에 인쇄된≪고려사절요≫의 廣布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있었다. 즉 그 해 7월 성삼문은 광포를 주장하였고,248) 단종 2년에 이극감이≪고려사≫의 광포를 주장하면서, 김종서가≪고려사≫의 인물에 대한 시비득실을 두려워하여 소량만 인출하여 내부에 두고≪고려사절요≫만을 인출하였음을 비난한 사례에서249) 알 수 있다. 이 책은≪고려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서로,250) 비록「節要」라는 명칭이 붙여지기는 하였으나 결코≪고려사≫를 줄인 책이 아니라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 사서이다.
≪고려사절요≫가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편찬된 것은 기왕에 편년체로 된 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윤회의≪수교고려사≫나 권제의≪고려사전문≫은 비록 내용상의 문제로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두 책 모두 편년체 사서로서≪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데 기본자료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상세한≪고려사전문≫을 기본자료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려사절요≫의 기본자료로≪수교고려사≫를 들고 있기도 하나,251) 이러한 견해는 세종 24년(1442)에 권제에 의하여 편찬된≪고려사전문≫을 친왕적인 사서라는 정치적인 면으로 파악한 점과 세조 4년(1458) 왕명에 의해 이를 교정한 것을 성종 13년(1482) 양성지가 간행하기를 청하였다는 점에 주목한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고려사전문≫을 재간행하자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용이 훨씬 상세하고 많은 자료를 모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수사관은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신석조, 신숙주, 김예몽, 양성지, 이예, 金之慶, 金閏福, 이극감, 尹起畎, 朴元貞, 洪若治, 李孝長, 全孝宇, 金勇, 韓瑞鳳, 허후, 박팽년, 유성원, 李季甸, 金孟獻, 金礩, 李翊, 李尹仁, 尹子榮, 金漢啓 등 모두 28명이고, 그 중 7명이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과 다르다.252) 이는 편찬이 완료되기 전에 직책이 바뀌었던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그들은 하위급의 春秋館 記事官이 대부분이었으며, 편찬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두 사서의 편찬에 계속 참여하였다. 그리고 두사서 편찬에 모두 참여한 사람은 21명253)으로, 정치적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으며, 다만 편찬목적에 따른 사료의 선택이 상이한 방향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두 사서는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단≪고려사≫는 修史의 주체가 군주였기 때문에 군주 중심의 경향이 강하고,≪고려사절요≫는 주체가 신료였기 때문에 신료중심의 사서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설도 있다.254)
≪고려사절요≫의 범례는 모두 4개항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治亂興亡에 관계있는 기사로서 감계가 될 수 있는 기사는 상세히 기술했으며, 기타는≪고려사≫에 실렸으므로 간략히 처리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모든 자료를 다 실으면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치란흥망과 관계가 없는 기사는 삭제하여 그 요강만을 기록한다는 것과 정치적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편찬한다는 편찬목적을 밝힌 것이다.
둘째는 편찬원칙을 적은 것으로 왕과 왕실에 관련된 용어는 비록 참유하더라도 이를 직서한다는 직서주의 원칙을 천명하면서, 기사를 싣고 뺀 것을 항목별로 제시하였다. 즉 조회·제사의 평상적인 일은 이를 거행하지 못하였을 때에만 기록한다. 단 임금이 직접 참여한 제사는 기록한다. 임금이 사찰에 행차하거나 보살계를 받고 도량을 연 것은 당시 군주들의 일반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번거롭게 다 쓰지 않고 각 왕의 처음 기사만 쓴다. 단 飯僧이 천여 명에 이르러 곡식을 많이 소비한 경우는 반드시 쓴다. 상국의 사신 왕래는 번거롭더라도 반드시 쓴다. 災異의 기사는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쓴다. 왕이 사냥나간 일과 연회를 연 것은 반드시 쓴다. 대신의 임명과 파면 및 어진 선비의 관계진퇴는 상세히 쓰며, 신하들의 상소문 가운데 받아들여져 행하여진 것과 일이 절실한 내용은 상세히 기록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후대 군주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군주는 조회와 제사를 걸러서는 안된다는 것, 불교신앙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중국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 天譴이 나타나면 이를 경건히 받아들이라는 것, 유희·오락을 삼가라는 것, 대신과 현신의 대우를 잘하라는 것, 충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군주에게 경계시키려 한 것이다.255)
셋째는 우왕의 경우 王莽의 예에 따라 기년으로 표시하지 않고 갑자의 간지로 써서 참절한 죄를 바르게 한다는 원칙이다. 실제로≪고려사절요≫에서는 우왕대의 기록에서 기년표시는 간지로 하고 그 아래 辛禑 몇 년으로 작은 글씨로 분주하였다.
넷째는 공양왕 원년 10월 이전은 비록 창왕이 재위하였으나,≪資治通鑑≫의 원칙을 들어 정월부터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창왕이 즉위한 해의 기사는 우왕 14년조로 기술되고 다음해는 공양왕 원년으로 기술됨으로써 창왕의 기년은 기록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의 편찬자들이 거의 대부분≪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이고 그 편찬시기가 5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두 사서에 나타나는 역사관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고려사≫가 모든 자료를 자세히 기록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에 반해,≪고려사절요≫는 후대 군주에게 정치에 참조하라는 교훈적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이는≪고려사절요≫에서 고려 전시기에 걸쳐 많은 사론을 싣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사론을 싣는 데 대한 범례가 없으나,≪고려사≫와 마찬가지로 찬자들이 사론을 써넣지 않았다. 그러나≪고려사절요≫는 후대의 군주에게 정치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고려왕조의 실록에 수록되었던 당대 史臣의 사론,≪국사≫에 실렸던 이제현의 사론, 정도전·정총 등이≪고려국사≫에 써넣었던 사론 등 총 108편의 사론을 실었다. 이는≪고려사≫에서 34편의 사론을 실은 것에 비하여 대단히 많은 사론을 실은 것으로 고려왕조와 조선 초기의 사학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려사절요≫가 그 내용에 있어서≪고려사≫보다 일반적으로 소략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고려사≫에서 찾을 수 없는 기록도 있으며, 특히≪고려사≫에서는 한 내용이 세가·지·열전으로 나누어 기술됨으로써 연월에 관한 기록이 많이 누락된 데 비하여,≪고려사절요≫의 모든 기사는 년·월·일의 순으로 기술됨으로써 이러한 점은 보다 상세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사건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는≪고려사절요≫가≪고려사≫보다 월등히 좋은 자료가 된다. 따라서≪고려사절요≫는≪고려사≫와 더불어 고려시대에 관한 중요한 사료집이며, 또한 사학사상을 연구하는 사학사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서라고 할 수 있다.
245) | ≪文宗實錄≫권 12, 문종 2년 2월 갑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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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 단종 원년의 갑인자 초판본은 일본 蓬左文庫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에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
247) | ≪端宗實錄≫권 7, 단종 원년 7월 정축. |
248) | 위와 같음. |
249) | ≪端宗實錄≫권 12, 단종 2년 10월 신묘. |
250) | ≪高麗史節要≫는 성종시대(1470∼1494)에 을해자로 다시 간행되었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에서 규장각본(을해자본)을 대본으로 영인한바 있고, 이는 1960년에 동국문화사에서 다시 영인되었다. 같은 해 일본 학습원 동양문화연구소에서는 봉좌문고본을 영인하였으며 이를 대본으로 다시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 출판한 바 있다. 1968년에는 동국문화사본을 이용하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이 나왔다. |
251) | 韓永愚, 앞의 책(1981), 93쪽. |
252) | 그 7인은 이계전·김맹헌·김질·이익·이윤인·윤자영·김한계이다. |
253) | ≪高麗史≫편찬자 명단에서 누락된 허후·박팽년·유성원을 포함하였다. |
254) | 韓永愚, 앞의 책(1981), 83∼134쪽. |
255) | 이러한 편찬원칙은≪高麗國史≫의 序에 나타난 편찬원칙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邊太燮,<高麗史·高麗史節要의 纂修凡例>,≪韓國史硏究≫46, 1984, 55∼5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