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삼국사절요≫
세조는 4년(1458) 9월에 문신들에게≪동국통감≫의 편찬을 명하였다. 이처럼 사서의 편찬 초기에 서명이 정하여지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이는 세종대에≪資治通鑑綱目≫을 깊이 연구하여≪思政殿訓義本≫을 출판해 낸 것과≪治平要覽≫을 편찬한 데서 나온 중국사의 편찬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 성립된 것이다.256) 그런데 세조대에 부왕인 세종이≪자치통감강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에 비하여≪자치통감≫체재인≪동국통감≫을 편찬하려 한 이유로는 다음의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나라 역사가 통감형식으로 정리된 것이 아직 없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세조의 즉위과정으로 보아 그에게는 역사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강목형식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조는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중국의≪자치통감≫에 준하는≪동국통감≫을 수찬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를 상고 이래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 때 세조는 우리 나라의 역사책은 빠진 것이 많고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삼국사와 고려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합쳐 편찬하되, 여러 책에서 자료를 보완하라고 명하였다.257) 여기에서 본국의 역사기록에 탈락된 곳이 많으므로 그를 보완하여 보다 충실한 사서로 만들려 했던 것과 단대사가 아닌 상고 이래의 통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뒤 세조 9년 9월에 또 다시≪동국통감≫수찬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명령하였으며,258) 양성지로 하여금 여러 유생을 데리고 편찬하게 하고, 신숙주와 권람은 이를 감수하고, 李坡는 그 출납을 맡도록 명하였다.259)
세조의≪동국통감≫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260) 편찬이 세조의 뜻에 만족할 만한 정도로 진척되지 않아 세조의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편년체 역사를 편찬하는 유신들이 국가정치와 관련된 기사내용을 중시하여 불교측 자료를 배제하려 하였고, 년·월·일이 없는 황당한 설화도 취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세조가 고대사를 단군 중심으로 편찬하려 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261)은 신빙하기 어렵다.
세조 12년 7월 이후에는 북방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이에 관한 노력은 중지된 듯하다. 왜냐하면 이후≪동국통감≫의 편찬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자 이 사서의 편찬에 참여한 바 있는 崔淑精은 경연에서≪동국통감≫의 편찬을 완결할 것을 건의하였다.262)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편찬을 완수하도록 명하였으나, 곧 예종이 죽음으로써 편찬사업은 다시 중단되었다. 그 후 성종 5년(1474)에 당시 영의정으로 정무를 주도하던 신숙주에게 명하여≪동국통감≫의 편찬을 마치도록 하였다.263) 신숙주는 세조대부터≪동국통감≫의 편찬에 참여한 바 있던 이파로 하여금 이를 완성하게 하여, 성종 7년 12월에≪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바쳤다.264)
이 책을 바치는 表箋文은 盧思愼·徐居正·李坡의 이름으로 지어졌으며, 서문은 서거정이 썼다. 그러나≪삼국사절요≫의 편찬 주역은 세조 9년≪동국통감≫수찬이 착수될 때부터 계속 이 작업에 종사하였던 이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세조 이래≪동국통감≫이라는 명칭으로 수찬된 것은≪삼국사절요≫로 귀착되고,≪동국통감≫은 다시 성종 14년 10월 서거정의 발의로 수찬이 시작되었다.265)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삼국의 멸망까지를 다룬 사서인데 총 14권으로 삼국 이전의 상고사는 외기로서 권수 안에 넣지 않고 별도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서문이나 표문에는 15권으로 되어 있으나,266)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14권으로 편찬되었다. 세조년간에 주조된 乙亥字로 출판되었는데 대체로 성종년간의 수찬 직후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267)
≪삼국사절요≫의 체재는 편년체이다. 원래 세조대에 편찬이 시도된≪동국통감≫은 그 준비작업으로서 모든 자료를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長編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 “全史만 있고 장편과 강목이 없어도 안되고, 장편과 강목이 있고 전사가 없어도 또한 안된다. 요컨대 이 세 가지 체재는 모두 구비함이 필요하다”268)고 하여, 기전체의≪삼국사기≫와 강목체의≪동국사략≫에 비견하는 장편체의≪삼국사절요≫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 언급한 장편은≪자치통감≫을 말하는 것으로 서문의 작자는≪자치통감≫을 편찬하기 위해 많은 양의 사료를 모은 대본으로서의≪자치통감장편≫과≪자치통감≫을 혼동하여 쓰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전사는 기전체를, 장편은 편년체 또는 통감 형식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삼국사절요≫의 책이름이「절요」라는 점에서 장편의 내용을 줄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269) 이는≪고려사절요≫의 이름과 연관시키기 위하여 취해진 이름이고, 원래의 자료가 부족한 한국고대사부분에서는「절요」라 하여도 장편에서 취합되었던 내용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실렸을 것이다. 그리고 편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입장에서 기사를 탈락시킨≪동국사략≫이나 정치적 교훈을 위해 사건을 발췌하여 정리한≪동국통감≫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삼국사절요≫의 편찬원칙에 대하여 살펴보면 조선 초기 권근이≪동국사략≫을 쓰면서 삼국시대의「즉위년칭원법」이 예가 아니라 하여,「유년칭원법」으로 개서하여 서술한 점을 다시 고쳐서 사실대로 직서하였다. 그리고 신라중심적인 편년체계를 수정하여 삼국사를 균등히 보아 삼국을 각각 독립된 나라의 역사로서 대등하게 다루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9년(669) 이후부터는 신라를 정통으로 다루었고, 발해사는 제외시켰다. 한편 연대표시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병존하기 시작한 신라 혁거세 21년(B.C. 37)부터 문무왕 9년의 삼국통일까지는 중국·신라·고구려·백제의 年紀를 작은 글자로 2행으로 썼으며,270) 그 후는 신라왕의 연기를 큰 글자로 앞에 쓰고 중국 연기는 부주로 썼다. 모든 연기의 난 위에는 간지를 밝혔다. 이러한 표기방식은 조선시대의 삼국사 연기표시의 관례가 되었다.
서술내용은≪삼국사기≫·≪삼국유사≫·≪수이전≫등에서 국가정치와 관련이 되는 기록을 모두 옮겨 실었다. 특히≪삼국사기≫본기와 열전·지를 중심으로 서술하였지만, 삼국 상호간이 전쟁기사는 하나의 편년에 의하여 서술함으로써 기사의 중복을 피하였으며, 삼국간의 기사 가운데 착오가 있는 부분을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삼국사기≫의 지 및 열전의 내용에서 장황한 것은 세주로 처리하였다. 또≪삼국유사≫기이조에 실린 신화나 전설로≪삼국사기≫의 내용과 상이한 것은 부주로 인용하였으며, 다만 단군조선에 대한 신화는 인용하지 않았다. 그 외≪동국사략≫·≪동명왕편≫·≪고려사≫·≪八道地理志≫·≪舊唐書≫등에서 널리 자료를 채록하여 서술함으로써 삼국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혔다.271) 그러나 더 많이 수록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불교사자료가 보완되지 않은 점은 당시 유신들의 유교적 역사관 때문이었다.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 말까지 우리 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잡은 역사서이며, 세종과 세조대 역사학의 학풍에 따라 객관적인 서술을 하여 조선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틀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술면에서 볼 때 직서 위주로 서술된 점과 신라에 대한 기술이 객관적이라는 점, 세주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는 점과 사론을 붙이지 않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사실을 가능한 한 직서하려는 입장과 많은 사료를 채집하려는 점은 역사학에서 본다면 하나의 커다란 진전인 것이다.272)
자료상으로도≪삼국사기≫에 이용되지 않은 자료를 보완한 점 등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수이전≫은 오늘날 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인용된 자료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삼국사기≫의 옛 판본 중 완질을 갖춘 것으로서 제일 오래 된 것은 중종 7년(1512)에 경주에서 목판으로 찍은 것이다. 이 판본에는 많은 오자가 있음에 비하여≪삼국사절요≫에서 이용한≪삼국사기≫ 및 그 밖에 자료는 고려시대에 간인된 것이거나 아니면 조선 태조 초년에 찍은 善本을 대본으로 이용한 것이므로,≪삼국사기≫의 오자를 바로잡는데 아주 귀중한 길잡이가 된다. 그리고≪삼국사절요≫는≪동국통감≫편찬에 있어서 고대사의 대본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256) | 鄭求福,<三國史節要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歷史敎育≫18, 1975), 90∼9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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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 ≪世祖實錄≫권 14, 세조 4년 9월 병신. |
258) | ≪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9월 신유. |
259) | ≪世祖實錄≫권 31, 세조 9년 9월 계미. |
260) | 鄭求福, 앞의 글(1975b), 94∼99쪽. |
261) | 韓永愚, 앞의 책(1981), 64쪽. |
262) | ≪睿宗實錄≫권 8, 예종 원년 10월 갑인. |
263) | 申叔舟,≪保閑齋集≫, 文忠公行狀(姜希孟撰). |
264) | ≪成宗實錄≫권 74, 성종 7년 12월 병술. |
265) | ≪成宗實錄≫권 159, 성종 14년 10월 정묘. |
266) | ≪三國史節要≫, 三國史節要箋(盧思愼撰). 이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의 기사가 외기로 독립되어 있어 이를 따로 권수에 넣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267) | ≪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조에는 梁誠之가 다른 도서와 함께≪三國史節要≫를 네 곳의 사고에 안장할 것을 주청하고 있는 데서 그 이전에 이미 간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외 다른 판본은 보이지 않으며 규장각에 있는 성종대 乙亥字本을 1973년 亞細亞文化社에서 영인하였다. |
268) | ≪三國史節要≫, 三國史節要序(徐居正撰). |
269) | 韓永愚, 앞의 책(1981), 69쪽. |
270) | 중국의 연기를 삼국의 연기 앞에 서술한 이유를<三國史節要序>에서는 천자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하였으나, 그보다는 연대를 비교하는 기준의 필요성에서 고려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문무왕 9년 이후에는 중국의 연기가 부주로 처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鄭求福, 앞의 글, 1975b, 105쪽). |
271) | 鄭求福, 위의 글, 110∼120쪽. |
272) | 이 책의 성격을 원래 세조가 구상한 것과는 다르게, 유교적 명분을 확립하여 사대질서를 옹호하고 신권 중심의 유교적 통치이념을 정립하려는 교훈적 의미가 강하게 반영된 사서로 평가한 설도 있다(韓永愚, 앞의 책, 1981, 66∼7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