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동국통감≫
세조대의≪東國通鑑≫수찬작업은 일단 성종 7년(1476)에 삼국시대 부분이≪삼국사절요≫로 마무리되어 그 때까지≪동국통감≫편찬의 명목으로 진행되어 온 작업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성종 14년 10월에 서거정의 발의로≪동국통감≫편찬이 다시 시작되어,273) 다음해인 15년 11월에 일단 완성되고,274) 성종 16년 7월에 기존의≪동국통감≫에 사론을 다시 써넣은 56권의≪新編東國通鑑≫이 완성되어 찬진되었다.275)
이 책은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깊어져서 여러 차례 역사편찬 사업이 이루어졌으며,≪자치통감≫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깊이 이루어졌고, 15세기의 민족문화가 중국의 문헌정리 방식과 체계에 따라 부문별로 체계화하는 편찬사업이 크게 이루어졌다는 배경 속에서 편찬되었다. 특히 세조와 성종이 모두 후대의 군주와 신하에게 정치적 교훈을 주기 위한 감계서를 편찬하려는 의지를 표명하여 그 결과로 나온 것이라 하겠다.
≪동국통감≫의 편찬사업에 참여한 사람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李克墩의 서문에 따르면≪동국통감≫편찬을 위한 東國通鑑廳이 설치되고 그 편찬자로는 堂上에 서거정·이극돈·鄭孝恒·孫比長·李淑瑊이 참여하였고, 郎廳직에는 金潾·李承寧·表沿沫·崔溥·柳仁洪 등이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종 16년≪신편동국통감≫을 올리자, 성종이 서거정·이극돈·정효항·손비장·이숙함에게 단자 각 1필씩을 나누어 주고, 낭청 표연말 등 10인에게 녹피 각 1장씩을 내려 주었다는 기사에서276) 세조 9년(1463)의 동국통감청과 같은 기구가 이 때에도 구성되었고, 그 편찬원은 당상과 낭청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사의 편찬은 이들 낭청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며 사론의 서술도 최보·표연말 등 낭청들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고, 당상관에 의해 수정·보완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국통감≫의 사론에 나타나는 경향성으로 보아 당시 신진사림의 비판논조와 일치하고 최보의 문집에 그가 작성한 사론이 실려있는 점을 통하여 신진사림들이 사론을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편찬의 기본원칙과 서술의 수정·보완은 훈구파인 당상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편찬의 대본들도 전시대의 연구결과였으므로,≪동국통감≫은 15세기의 역사정리 위에 신진사림들의 새로운 역사연구 의식이 보태진 역사서라 할 수 있다.277)
≪동국통감≫의 편찬체재는 편년체로서,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에 이르는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총정리하여 통사로 정리한 최초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의 역사는 권근의≪동국사략≫과≪삼국사절요≫의 체재에 따라 外紀로, 삼국초부터 삼국 공존기간의 역사는 三國紀, 문무왕 9년 이후의 역사를 新羅紀, 고려 태조 19년(936) 이후의 역사를 高麗紀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삼국기에서는≪동국사략≫과≪삼국사절요≫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월년으로 서술하되 삼국이 당시 대등한 관계에 있었음을 중시하여 삼국의 역사를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즉 이 시기는 강목의 예로 따라 무정통의 시기로 처리한다는 것이다.278) 이는 권근이 신라를 삼국의 정통으로 서술한 것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 된다.
서술방법은≪삼국사기≫와≪고려사≫의 서술방법을 계승하여 직서주의로 서술되었으면서도 명분론이 작용하였다. 즉 왕의 칭호와 왕에 관계되는 용어, 관제의 명칭 등은 천자의 것과 같은 것이라도 직서하였으나, 신라의 여왕은 여주라고 폄칭하였으며 우왕의 연기표시는 작은 글자로 辛禑로 표기하여 폄삭의 뜻을 보였다. 따라서 직서주의를 근간으로 하되 유교적인 가치기준으로 폄삭하였던 것이다. 또 연기표기는 삼국 당시의 사실대로「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으며, 표기는 삼국 공존기에는 중국 연기와 삼국 연기를 병기하고 신라 혁거세 21년까지와 문무왕 이후의 신라기에는 신라 연기를 크게 쓰고, 송·거란·금·원·명 등 중국의 연기를 작은 글자로 부주하였다. 이는≪삼국사절요≫의 서술방식을 따른 것으로, 중국에 대하여 참의스럽기 때문이라는 명분론적인 범례의 설명을 실제 서술내용과 괴리된다. 이는 이전 사서의 서술방식을 계승하여 저술하였기 때문에, 범례의 원칙과 차이가 생겼다.
≪동국통감≫의 서술내용은 신화와 전설적인 것이 배제되었으며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자연·재이 등과 같은 개별적인 기사는 삭제되는 대신에, 역사적 교훈을 주기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왕의 정치와 이를 보필한 신하의 업적에 관한 사료들이 주로 발췌되었다. 그러나≪삼국사절요≫를 따른 결과이긴 하지만≪삼국유사≫관계의 기록이 서술되어 있으며,≪삼국사절요≫에서는 별로 강조되지 않던 발해사가 많이 나오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왕의 본기에 속하는 사료와 개인열전에 관계되는 사료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고, 국가의 통치제도나 법제적인 사료 즉 지에 서술된 내용들은 대체로 탈락되었다. 편찬대본은≪삼국사절요≫와≪고려사전문≫이었을 것이므로,279)≪삼국사기≫와≪고려사절요≫에 없는 내용이 수록되었다.
≪동국통감≫의 사상적 성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론에는 편찬자가 써붙인 204편과 이전의 사서에서 인용한 181편, 모두 385편이 수록되었다.280) 이 때 이전의 사론은≪동국통감≫찬자의 서론에 대하여 보족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몇몇 사론을 제외하고는 이전의 사론을 모두 싣는 원칙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동국통감≫은 이전의 사론을 거의 다 수록하였다.
204편의 사론은 역대 제왕의 업적을 논한 歷年圖의 사론 4편과 개별사건을 논한 20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200편은 사학적인 사론 20편과 포폄을 내린 교훈적인 사론 180여 편으로 되어 있다.
사학적인 사론은 문제의식이 일부 들어 있지만, 논지 전개가 극히 단조로우며 고증에 있어서도 그다지 정밀하지는 않다. 이들 사학적인 사론은 대부분 삼국시대에 한정되어 있다. 이는 이전시대에 대한 지속적인 정리작업의 결과로 생각된다.
교훈적인 사론은 주로 군주를 포폄한 것과 개인 인물을 포폄한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폄하한 사론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사론에서 군주의 仁政·恤民之政·賢政 등이 포찬되었고, 강상의 윤리를 어긴 군주와 불교를 숭봉한 군왕, 왕위와 왕통을 지키지 못한 군주, 난신적자를 처벌하지 못한 군주, 사대교린에 실패한 군왕, 향략에 빠진 군주 등이 폄론되었다. 개인 인물로서는 국가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킨 명장과 충의와 지조를 바친 충신·열사를 높이 칭찬하였고, 대신과 대간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 유자로서 불교를 숭봉한 자, 왕권을 위협한 강신들, 권력을 남용하여 불법을 자행한 권신들, 조선 태조의 정적들, 소인배들이 폄론되었다. 그리하여 국가를 발전시키는 방책으로 도덕적 군주를 만들기 위해≪貞觀政要≫가 배격되고 요순의 정치이념이 이상으로 표명되며, 군주를 보필하는 신하가 체통을 지켜 자신의 직책을 성실히 지킬 것, 그리고 절의와 지절을 지키는 신하를 양성하고, 유교적 계율에 의지할 것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찬자 자신이 쓴 사론은 대체로 춘추대의론에 입각하여 절의를 숭상하고 난신적자를 성토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론을 살펴보면≪동국통감≫의 찬자는 군주국가를 이상으로 하였다. 그리고 유교문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국가를 보전하기 위하여 군주는 사대교린을 성실히 하여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군주와 그를 보필하는 신하의 개인적 역량에 두었다. 그리고 이전의 사론의 논조를 주로 계승하면서도 성종대 당시의 문제의식을 반영하였으니, 국가제도 등에 대하여는 거의 무관심한 반면 절의를 숭상한 사론을 많이 기록하였다. 사론의 경향은 漢·唐流의 유학을 극복하고 宋學流의 유학을 표방하였으며, 天道思想과 민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사론은 고려시대에 치중하였으며, 윤리적·종교적·정치적인 면을 크게 주목하였다.281)
≪동국통감≫에는 세종과 세조 이래의 역사서술에서 객관화와 사료수집의 충실성 등을 보여온 훈고학적 서술방법과 서술내용을 계승하고 있다. 또 정도전의≪고려국사≫, 권근의≪동국사략≫에서 보여준 통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이념의 제시라는 주관적 측면이 강조된 유교학자의 사론이 수록되었다. 그리고≪동국통감≫은 국초 이래의 전대사 정리작업과 고려시대 정리작업으로 발전되어 온 역사정리 방법에 의해 이루어져 전시대사의 총결집으로 완성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 학자들의 역사연구의 원전으로 이용됨으로써 유교사관에 의한 역사연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273) | ≪成宗實錄≫권 156, 성종 14년 7월 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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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 ≪成宗實錄≫권 172, 성종 15년 11월 병신. |
275) | ≪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갑술. 현재≪東國通鑑≫의 간본으로는 성종대 校書館에서 간행한 주자본과 평양과 대구의 감영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다. 한편 일본에서 1666년 필사본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11년 光文會와 1912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신활자본으로 출판하였으며, 景仁文化社에서 광문회본을 다시 영인하여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리고 1914년 조선연구회에서 일어 역문본을 출판하였다. |
276) | ≪成宗實錄≫권 181, 성종 16년 7월 갑술. |
277) | 鄭求福,<東國通鑑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韓國史硏究≫21·22, 1978), 131∼137쪽. |
278) | 鄭求福, 위의 글, 137∼140쪽. |
279) | 鄭求福, 위의 글, 140∼142쪽. 비록 원전적인 가치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현재 전하고 있지 않는≪고려사전문≫을 근간으로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어 고려시대사의 이해를 위해서는≪고려사≫나≪고려사절요≫와 신중한 비교·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
280) | 李元淳·韓永愚는 전체≪동국통감≫의 사론을 382편으로 계산하였다. 이는 기왕의 사서에서 나온 구사론의 수를 178편으로 계산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李元淳,<鮮初史書의 歷史認識>,≪韓國民族思想史大系≫中世篇, 亞細亞學術硏究會, 1974 및 韓永愚,<東國通鑑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韓國學報≫15·16, 1979;앞의 책, 1981 참조). |
281) | 이상 사론에 대한 분석은 鄭求福, 앞의 글(1978), 142∼185쪽 참조. 한편 성종 15년 徐居正의≪동국통감≫을 훈신 중심의 사서로 파악하고, 다음해의≪新編東國通鑑≫을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반영된 사서로 파악하여, 그 정치적 성격을 세조 및 그를 보좌하는 훈신을 공격하는 의미를 지니고 간접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부국강병책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니며 성종의 왕권신장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韓永愚, 앞의 책, 1981, 216∼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