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관
협의의 史官은 통칭 한림으로 일컬어지는294) 예문관의 봉교 이하의 참외사관으로295) 입시하여 국왕의 언동, 신하와의 정치논의 등을 기술하는 8인의296) 기사관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활동과 관련되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들과 더불어 사초를 작성할 수 있는 기주관·편수관·수찬관까지도 사관이라고 칭하였을 것이며, 가장 넓은 의미로는 춘추관의 총재직까지도 사관에 포함되었을 것이다.297)
중앙의 사관편제와 더불어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풍속과 수령의 정치득실 등에 대한 기록을 얻기 위해 外史의 설치에 대한 논의298)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12牧과 東·西京의 司錄이 외사직을 맡았으나,299) 조선시대에는 고정적인 외사의 설치는 없었으며 다만 지방수령이나 都事로서 문한에 능한 자를 춘추관의 직에 겸직시켜 記事官 또는 記注官으로서 사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300)
사관들은 정확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正殿에서의 聽政 뿐만 아니라 朝啓·經筵·行幸에까지도 入參·隨從을 주장하였는데, 왕에 따라 규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점차 그 허용범위가 확대되었다. 즉 태조대에는 사관의 입시가 허용되지 않았으나, 정종대 이후 사관이 경연에 입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후 간헐적으로 중지한 때도 있으나 경연에 사관이 입시하는 것은 상례가 되었다. 태종 원년(1400) 4월부터 사관의 좌우입시가 허용되었으나, 청정할 때 사관이 입시하는 것을 규제하였고, 행차에도 사관이 수행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사관입시는 점차 넓어져 태종 13년에는 사관의 청정입시가 허용되었으며, 세종대에는 侍臣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세조·성종대를 지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그리고 조계에 입시할 때는 사관 중 1명은 다른 신하들보다 가장 먼저 들어가고, 가장 늦게 나오도록 함으로써 추기해야 하는 불편을 없애고 기사에 유망이 없도록 하였다.301)
사관의 직무는 그때그때의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 외에도 사관은 입시, 사초의 작성과 수납, 시정기 작성, 실록의 포쇄와 고출·분견 등 춘추관이 모든 실무를 담당하였으며,302) 이러한 직무에 따르는 활동외에도 청정이나 경연의 입시에 따르는 정치적 기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사관의 정치적 활동을 사림이 진출과 관련하여 보는 견해도 있다.303)
사관들의 입시 기회가 넓어진 것은 대간들의 지원이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사명감을 가진 사관들의 적극적 활동에 기인한 것이며, 당시 지배층의 강한 역사의식의 소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들의 적극적인 입시는 국왕과 신료 개인간의 사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 아첨하는 신하가 접근하는 길을 봉쇄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군주와 신하들은 사관들의 역사기록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사관들의 입시가 왕을 호위하는 무인이나 왕의 측근인 승지들에 의해 규제되기도 하였고, 모욕과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를 견디면서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는 강한 기개와 의지가 있어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사관이 되면「古風鞭罰」이나「沒頭受責」등을 통한 교육이 행해졌고,304) 결원이 생겼을 때 현직사관들이 천거하였는데,305) 천거하는 자가 피천자가 적임자라는 것을 皇天后土에 서약하는 축문을 읽는 것306)도 사관의식의 고양과 관련된 것이다.
294) | ≪成宗實錄≫권 47, 성종 5년 9월 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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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 | ≪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정월 무인. |
296) | ≪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정월 병신. |
297) | 鄭求福,<朝鮮初期의 春秋館과 實錄編纂>(≪朝鮮時代의 歷史意識≫, 제9회 韓國史學術會議, 國史編纂委員會, 1987), 33쪽. 地方官으로 春秋館職을 겸직한 사례는 많다. |
298) | 韓㳓劤,<朝鮮前期 史官과 實錄編纂에 관한 硏究>(≪震檀學報≫66, 1988), 84∼85쪽. |
299) | ≪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
300) | ≪中宗實錄≫권 22, 중종 10년 7월 신사. |
301) | 이상 史官의 入侍問題는 韓㳓劤, 앞의 글, 90∼96쪽 참조. |
302) | 車長燮,<朝鮮前期의 史官-職制 및 政治的 役割>(≪慶北史學≫6, 1983), 78∼85쪽. |
303) | 車長燮,<史官을 통해 본 朝鮮前期 士林派>(≪慶北史學≫8, 1985) 참조. |
304) | 鄭求福, 앞의 글(1987), 45쪽. |
305) | 韓㳓劤, 앞의 글(1988), 85∼89쪽. |
306) | ≪翰苑故事≫, (서울大 圖書館 所藏古書 5122-3). |